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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학교에서 공부 마치고 나오는 길에 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을 보고 급히 구도시가 보이는 방향으로 내달음질을 쳤는데 가서 보니 각도가 맞지 않더군요... 해가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찍고 싶었으나,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듯합니다.

아래 글은 고대 예루살렘의 도시 인구수에 대한 글입니다. 그 동안 공짜로 잘 이용했던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사이트였는데 이제부터는 연 회비 $50을 내야만 이용 가능하다고 하네요. 이거 고민됩니다..

고대 예루살렘 인구수는 그 중요성에도 불고하고 그 동안 학계에서 간과되어왔다. 또한 최근까지 학자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에루살렘 도시 인구수에 대한 고대 자료들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 1세기 유대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의 글은 역사적 사실들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수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갈릴리에는 약 204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중 가장 작은 마을 인구수가 15,000명이라고 기록했지만 (유대 전쟁사 3권 587쪽 이하), 이는 전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요세푸스의 예루살렘 인구수 역시 문제가 많다. 그는 말하기를,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할때 백십만의 유대인들을 죽였다고 기록한다. 또한 요세푸스는 기원전 3세기경 예루살렘의 인구수가 120,000명이었다고 말한다. (Contra Apion 1. 197. pp. 242f). 요세푸스가 이렇게 말한 것은 헬라 역사가 헤카테우스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만, 이 역서 심한 과장의 흔적이 있다.

오늘날 고고학 자료에 근거하여 우리는 고대 도시의 인구수에 대한 좀더 신뢰할만한 추정들을 할 수가 있다. 고대 도시 인구수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규모와 도시내의 인구밀도라는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된다.

지난 20여년 동안 행해진 예루살렘 고고학 발굴은 고대 예루살렘 도시의 규모에 대한 분명한 윤곽들을 그려낼 수가 있게 되었다. (역주 -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예루살렘 도시 크기는 "최대주의자"와 "최소주의자" 사이에 또거운 감자로 회자되는 주제이다. 특히 이스라엘 고고학계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대와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의 크기 문제로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회가 되면 각 학파의 주장을 요약해서 업데이트 시키려 한다) 또한 고고학은 고대 인구 밀도에 대한 믿을만한 근거들을 제시해 준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고대 도시 한 에이커당 인구 밀도는 대략 160-200명로 본다.

헨리 프랑크포트와 피니아스 델로가즈는 메소포타미아의 세 도시 (우르, 이쉬누나, 크하파제)에서 한 에이커당 평균 20여채의 집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일 한 가정당 6-10명정도의 가족이 살았다고 추정한다면 한 에이커당 대략 160명이 거주하였다고 할 수 있다. ( 8 X 20 =160). 존 가르스탕은 한 에이커당 200-240명의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보고 있으며, 파커는 고대 로마 도시인 오스티아 발굴을 통해 한 에이커당 160명 정도가 거주했다고 보고하였다.

위 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볼때 한 에이커당 160-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까지 그 유적이 남아있는 고대 도시들은 인구 밀도가 거의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다. 알레포의 인구 밀도와 다메섹의 인구 밀도는 한 에이커당 약 160명이다. 1918년 예루살렘 구도시의 인구 밀도는 한 에이커당 약 200명이었다.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에도 동일한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일반적으로 한 에이커당 160-200명정도의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학증하는 것이며, 오늘날 미국 도시들보다 더 조밀한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다. 트리폴리와 비슷한 크기 (180,000)의 미국의 한 도시에는 한 에이커당 50-80명정도의 사람들이 거주한다.

따라서 만일 고대 도시에 160-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에 동의한다며,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도시의 크기 즉 몇 에이커였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도시 경계는 지도로 설명하는 것이 단순한 기술을 통한 설명보다 휠씬 이해가 쉽기 때문에 지도를 통해 도시의 크기를 설명하고자 한다.

1. 첫번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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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지도는 여부스 족속과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이다. 다윗은 기원전 약 1,000년경에 도시를 점령하였다. 지도의 검은 선은 현대 예루살렘 구도시를 나타내는 선이다. 구도시의 낮은 지역에 있는 직사각형은 오늘날 황금돔이 있는 곳으로 헤롯 성전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 구도시 남쪽 아래 비탈이 바로 여부스 족속의 도시이자 다윗 도시가 있던 자리이다.

여부스 족속과 다윗 도시는 오늘날 구도시의 동편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었다. (동편 산등성이는 "오펠"로 불리며, 서편 산등성이는 시온산으로 불린다). 두개의 산등성이는 계곡에 의해 갈라진다. 케서린 케더린이 1961년부터 1967년 발굴한 여부스 족속의 도시 동편 성벽은 이전에 추정하던 것보다 더 동편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도시의 규모가 이전 학자들이 주장하던 것보다 컷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도시는 약 12 에이커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최대 2,400 (12 x 200)명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보다 적은 약 2,000명 정도로 추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2.두번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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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965-928년)은 다윗 도시를 성전산이 있는 북쪽으로 더 확장시킨다. 바로 성전산에 솔로몬은 성전과 자신의 궁전을 건축한다. 솔로몬의 도시는 거의 32 에이커정도였다. 따라서 당시 인구는 4,500-5,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솔로몬 이후 9-8세기때는 도시가 크게 확장되지는 안았다. 또한 남쪽과 동쪽으로는 계곡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도시가 확장될 수가 없었다. 벤자민 마자르 교수가 성전산 서쪽지역에서 9-8세경에 해당하는 무덤들을 발견한 후 그 지역이 고대 묘장지로 사용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묘지가 위치한 이 지역은 도시 외곽에 속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족만이 도시내에 매장되었다) 성전산 북쪽과 북서쪽은 현대 건물들이 이미 들어섰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을 진행할 수 없었다.


3. 세번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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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크게 확장된 때는 8세기 말로 히스기야때이다. (727-698). 아비가드 교수에 의한 구도시 유대인 지역 고고학 발굴을 통해 8세기 말경에 도시가 크게 확장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때 확장된 지역을 "상부 도시"라고 하며, 도시 확장의 증거로는 "폭이 넓은 성벽 (Broad Wall)"이 있다. 이 성벽 아래쪽에서 8세기 말경에 해당하는 주거지들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서쪽 산비탈 혹은 상부 도시에 8세기 후반 이전에도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히스기야때 예루살렘 도시가 갑작스럽게 확장된 주요한 이유로는 721년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남유다로 피난을 오게 되었고, 히스기야가 산헤갈립에게 반기를 든 이후 701년 산헤갈립의 침략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피난을 왔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성내의 인구수만을 조사하지만, 성외곽의 인구는 더 많았을 것이다. 히스기야 당시 도시의 크기는 약 125 에이커로 한 에이커당 200명으로 추정할 경우 약 25,000명이 도시에 거주하였다.

기원전 7세기(므낫세, 698-642, 요시야 639-609), 예루살렘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도시는 파괴가 되었고 페르시야 시대에 가서 다시 재건되기까지 파괴된채로 남아있었다.

케더린 케서린은 느헤미야의 성벽이 여부스 족속과 다윗 당시의 동편 성벽보다 더 높은 쪽에 위치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로 보건데, 페르시야 시대 도시의 규모가 축소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 네번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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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당시 에루살렘은 약 30 에이커로 솔로몬때보다 약간 규모가 작아졌으며 인구수는 대략 4,500명이다. 느헤미야 시대 이후 예루살렘이 크게 확장된 시기는 하스모니안 왕가때이다 (기원전 2세기경). 도시 성벽의 경계 - 요세푸스는 첫번째 성벽이라고 일컬었다-는 1894-1897년 사이 프레드릭 빌스의 최초 발굴 이후 1973년 저자가 직접 발굴한 다윗 망대 남쪽 발굴, 그리고 1976년 아비가드의 발굴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하스모니안 당시의 도시 경계는 아래 지도와 같다. 하스모니안 시대의 예루살렘은 약 165 에이커로 인구수는 대략 30,000-35,0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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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시대의 예루살렘 (기원전 37 -4년)은 요세푸스가 언급한 첫번째 성벽의 남족과 북쪽에 위치한 두번째 성벽에 둘러쌓여 있었다. 두번째 성벽이 헤롯 시대의 것인지, 아니면 하스모니안 왕가때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두번째 성벽의 어디까지 정확하게 둘러싸고 있는지도 모호하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물과 기록물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아비-요나의 주장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아래 지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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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약 230 에이커로 확장되었으나, 성전산 지역 36 에이커는 주거지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194 에이커가 된다. 따라서 당시 인구는 약 40,000명 정도이다.

헤롯 이후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도시가 파괴될때까지 예루살렘은 북쪽과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기원후 41-44)는 북쪽의 새로운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세번째 성벽"을 건설하지만 불분명한 이유로 완성하지는 못한다. 이 성벽은 66년경에 일어난 제 1차 유대 봉기때 거의 무너지게 된다.

요세푸스가 세번째 성벽이라 칭한 성벽은 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19세기 위대한 고고학자인 에드워드 로빈슨은 현재 구도시 북쪽 성벽중 약 600 피트가 세번째 성벽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논란이 되는 성벽은 1925-1927년 사이, 그리고 1940년 E. L. 슈케닌과 L.A. 메이어에 의해 발굴이 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세번째 성벽의 흔적이라는 주장은 에꼴 비블리케 (예루살렘에 있는 프랑스 고고학 기관) 의 L. H. 빈센트에 의해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빈센트는 현재 구도시의 북쪽 성벽에 세번째 성벽의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케서린 케니언 역시 이 주장을 뒤받침하였다. 사라 벧-아리에와 에후드 네쩨르는 슈케닉-메이어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한 새로운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세번째 성벽의 남은 흔적은 제 1세기경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벤 아리에 - 네째르의 발굴 조사 이전에도, 빈센트 - 케니언의 주장은 문제가 있었으며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이론으로 여겨진다. 아래 지도 ( 4 B.C - 70 A.D - Roman Jerusalem) 는 로빈슨이 로마에 의해 도시가 멸망당하기 이전에 그린 도시의 북쪽 성벽 라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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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시 크기는 약 450 에이커로 80,000명 정도가 도시내에 거주하였다. 예루살렘 파괴 이후의 도시 인구수에 대해서는 조사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도시 파괴 이후 19세기까지 도시민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사 이때 도시의 크기가 약 215 에이커였지만 도시민수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비잔틴 말기와 초기 아랍 시대는 경우가 다르다. 5세기 중엽에 유도시아 황후는 시온 산을 포함하는 성벽을 쌓게 되고 도시의 크기는 약 300 에이커로 확장되기도 하였다. 저스틴 황제 당시 (527-565), 그리고 오마야드 칼리프 (661-750) 당시 예루살렘은 다시 거주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 당시 인구수는 약 55,000-60,000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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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for the this article: Broshi, magen. "Estimating the population of ancient Jerusalem,' Biblical Archaeology Review, Jun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