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6-7). 


왜 웃사는 죽임을 당하였을까?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이십년 동안 머물던 법궤 (삼상 7:2)를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옮기던중 소 달구지에 실고 가던 법궤가 소의 날뜀으로 인해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는 법궤를 붙잡았다. 그는 아마 법궤를 보호하고자 붙잡았을텐데 하나님의 진노하심속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여러번 읽고 또 읽어보아도 웃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에 대해 속 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법궤는 레위인 (고핫 자손)이 메도록 규정되어 있으므로 (민 4:15), 레위인이 아닌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가 법궤를 만진것도 문제가 있고, 법궤를 레위인이 메지 않고 소 달구지로 옮기려 하였던 것도 문제가 된다. 고로 율법에서 금하는 잘못된 행위를 하였기에 웃사가 죽는것은 당연하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뭔가 찜찜한 것을 지울 수가 없다. 적어도 웃사가 손을 내밀어 법궤를 잡으려 하였던 것은 법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를 향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즉시 죽이시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웃사의 죽음! 어쩌면 법궤 운반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이 불행한 사건에서 성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하심속에서 죽어야만 했던 웃사가 주된 이야기의 초점이 아닌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먼저 법궤의 이동에 대해 정리해 보자. 사사 엘리 시대 당시 법궤는 에브라임 지파의 땅인 실로에 있었다.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아벡 전투를 할때 법궤를 실로에서 가져갔다가 전쟁에서 질뿐 아니라 법궤까지 빼았겼다. 삼상 4장4절에는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וישלח העם שלה וישאו משם את ארון בירת יהוה צבאות ישב הכברים (그 백성이 실로로 보내어 그곳으로부터 그룹들 사이에 앉아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다) 라고 되어 있다. 레위인이 법궤를 옮겼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법궤를 전쟁터에 가져오면 승리가 따라올줄 알았으나 오히려 전쟁을 이끌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음을 당하였고 법궤까지 빼앗긴 것이다 (삼상 4:11). 사실, 이 전쟁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부정과 타락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들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삼상 2:34). 결국 법궤를 빼앗기게 된 것 역시 타락한 리더십이 그 근본 문제였다. 


법궤가 블레셋 다섯 지방에 머무는 동안 독한 종기와 재앙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역에 미쳤다. 결국 이스라엘 신의 궤로 인해 사망의 그림자속에 들어가자 그 법궤를 다시 돌려보낸다.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고 한번도 멍에를 매어 보지 않은 두 마리의 소에 수레를 메우고 법궤를 실어 단지파의 땅인 벳세메스로 법궤를 보낸다 (삼상 6:1-12). 


삼상 6장 13절에 의하면, 벳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던 중 블레셋 지역으로부터 소가 법궤를 끌고 오는 것을 보고 레위인이 법궤를 내려 큰 돌 위에 두고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린다 (삼상 6:15). 이후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안을 들여다 보다가 칠십 명 (혹은 오만 칠십 명)이 죽음을 당한 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법궤를 가져가라고 요청한다 (삼상 6:19-2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가져와서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를 두고 엘이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는데, 법궤를 벳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옮길때에 레위인이 옮겼다는 텍스트의 증거는 없다! 아무튼 법궤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이십년간 보관되었고 그 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운반하고자 이스라엘에서 뽑은 삼만명을 모아 아비나답의 집으로 온다. 삼하 6장의 이야기를 다룬 대상 13장에는 다윗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 기록도 있다. 




사진: 법궤를 메고 가는 레위인들 (예루살렘 마밀라 거리 조각상)


다윗이 법궤를 옮기는 과정을 보면 그가 매우 흥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앙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삼하 6:5). 법궤를 옮기는 작업은 아비나답 혹은 그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가 진두지휘할 수 있거나 해서는 안되는 중대한 일이었다. 아효는 소 달구지를 몰고 웃사는 법궤 옆에 서서 걸었지만, 이 모든 일을 지휘 감독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다윗이었다. 대상 13장에 의하면 법궤를 옮기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 인물은 바로 다윗이었고 삼하 6장에서도 다윗이 법궤 옮기는 일에 앞장섰다. 그렇다면, 다윗은 신중하게 법궤 옮기는 일을 준비했어야 했다. 삼만명이라는 거대한 인원을 동원하는 것보다, 온갖 악기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면서 기뻐 춤추며 법궤를 옮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법궤를 어떻게 옮길것인가에 대한 준비였다. 


레위 사람이 직접 법궤를 매고 옮기라는 성서의 명대로, 다윗이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나 아효, 그리고 말못하는 짐승인 소가 아닌 레위 사람에게 법궤를 직접 메고 옮기도록 하였다면 소가 날뛰거나 웃사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명기 17장에 의하면 왕이 할 일은 전쟁 준비가 아닌 율법을 등사하여 그 율법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다. 다윗은 법궤를 운반하는 성서적 방법에 대해 반드시 알고 있었어야 했다. 다윗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행하였던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도 마찬가지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백성들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리더들이 아니던가? 


다윗과 삼만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는 사이, 소는 날뛰었고 소 달구지 위에 위험스럽게 실려있던 법궤는 흔들거리다가 결국 떨어질 찰나였다. 웃사는 순간적으로 그 법궤를 잡았다. 성서 저자는 분명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셨다고 말한다.


ויחר־אף יהוה בעזה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셨다!)


ויכהו שם האלהים על־השל (그 하나님께서 그 실수로 인해 그를 치셨다). 


성서 저자가 선택한 단어 של은 그 뜻이 매우 애매모호하다. 이 단어는 삼하 6:7에 단 한번 사용되었다. 성서 사전 HALOT에 의하면 של(쌀)은 아카드어의 "무례함, 건방짐," 혹은 "모독적인" 이란 단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웃사) 치셨다 를 뜻하는 ויכהו 에서는 웃사를 지칭하는 3인칭 단수 접미사가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이유의 표현인 전치사 (על) + 명사 (של) 다음에 3인칭 단수 접미사, 즉 웃사를 가리키는 접미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의(웃사) 실수 (혹은 무례함, 건방진 행위)로 인해 웃사를 치셨다" 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 실수로 인해 (혹은 그 무례한, 건방진 행위)로 인해 그를 치셨다" 라고 기록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웃사를 지칭하지 않고  "그 건방지고 무례한 행위로" 인해 웃사를 치셨다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은 후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나팔 소리는 사라졌고 춤은 멈췄다. 성서 저자는 이어지는 구절인 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한글 성서에서는 "다윗이 분하여" 라고 번역을 하였지만 원문의 의미는 이와 조금 다르다. 히브리어 원문의 전치사 ל + דוד 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전치사 ל 는 of, to, for, belong 등등의 의미가 있는데 만일 다윗이 주어라면 굳이 전치사 ל 와 함께 쓸 이유가 없다. 어쩌면 "It is displeasing to David" (이것이 다윗에게 화를 불러 일으켰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듯 하다. 웃사의 죽음이 다윗을 분노케 하였는데, 법궤를 옮기는 축제의 분위기가 웃사의 죽음으로 인해 망쳤기 때문에 다윗은 분노하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경솔한 준비와 성서의 명령에 무지한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일까? 결국 다윗은 법궤를 다윗성으로 메어가지 않고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동안 보관한 후 다시 다윗성으로 가져간다. 13절에 의하면 두번째 법궤를 옮길때 다윗은 더 이상 소 달구지가 아닌 사람들이 직접 법궤를 메고 가도록 한다. 분명 다윗은 자신의 성서적이지 않았던 실수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가 아닌 사람들이 법궤를 메도록 하였던 것이다. 


웃사의 죽음은 한 개인의 실수만으로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이다. 물론 웃사도 법궤 운반과 관련된 성서의 명령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다윗, 그리고 그와 함께 하였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더더욱 자유롭지 못할뿐 아니라 웃사의 죽음에 대한 연대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법궤 운반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다윗을 직접 치시지는 않으셨다. 현장 책임자인 웃사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물었지만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즉각적인 징계는 웃사를 넘어 다윗과 그의 무리들을 향한 것이었다. 


웃사의 죽음에 대해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내가 까다로운 신학적인(???) 질문을 하였기 때문이다. 자료들을 찾고 읽어보니, 모든 초점이 웃사에게 맞춰져 있거나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진노하셨고 웃사가 마땅이 죽어야할 벌을 내리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변호의 글들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변명이나 변호로 그분의 행위가 옳다고 인정받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웃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웃사에게만 돌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진노의 화살을 쏘셨다는 것이 성서 저자의 의도는 아니라고 본다. 성서 저자는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의 리더십 부재의 연속선상에서 사울과 다윗의 리더십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연약하고 무지하며 연대 책임을 지지 않는 리더십의 문제를 지적한다. 웃사의 죽음 앞에서 다윗은 분노할 것이 아니라 회개를 했어야 한다. 한 아들을 잃은 아비나답 앞에 그는 용서를 구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단 선지자처럼 "당신이 잘못이요!" 라고 다윗 앞에 당당히 서지 못했다. 다윗 스스로도 책임지는 리더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웃사의 죽음과 분노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분노하는 리더십속에서 오늘날의 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본다. 많은 무리가 모이는 축제 분위기가 있고 법궤 앞에서 춤을 추며 찬양하며 승리를 자축하는듯한 우리 교회. 그러나 그 축제 가운데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다. 그 조그만 산골 동네인 기럇여아림에 삼만명이라는 거대한 군중이 운집해 있었지만 그 안에 "성서의 명대로" 법궤를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는 없었다. 한 인생이 죽었지만 누구도 그 인생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진노하심속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당연시할 뿐이다! 그러나 "성서가 명하는대로"의 리더십이 죽어 있기에 한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속에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정치 세계에서 일어나는 꼴불견같은 일들을 보면 문제는 터지지만 책임지는 리더십은 없는 것을 흔히 본다. 비단 정치 세계뿐 아니라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마땅히 책임지는 손을 들려 하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책임지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부실한 리더십으로 인해 복음이 힘없이 쓰러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 (삼하 6:13)! 웃사 사건 석 달뒤 다윗은 소 달구지가 아닌 사람들이 법궤를 메도록 하였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성서가 명하는대로"의 리더십을 회복한 것이다. 우리 교회도 "석 달"뒤 성서가 명하는대로의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까? 





스스로 분쟁하는 하나님의 나라

Church Story 2013.05.10 08:36 Posted by Israel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마 12:25) 


교회들이 서로 경쟁한다면 사단이 감독으로 있는 사단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알지 못하게 조용히 그러나 즐겁게 춤을 춘다. 


귀신들을 내쫓고, 병자들의 병을 고치며 심지어 문둥병 환자의 병을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우리 주변에서 늘 보고 듣는 일이라면 이런 일들은 일상의 일부분이기에 놀라운, 혹은 신비스런 일이 아닐 것이다. 


신약 성서의 이야기들 중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분명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별히 예수의 사역중에는 치유와 축사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린 이야기들이 등장하며 지금이나 이런 일들은 "기적"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즉 흔히 보고 들을 수 없는일이다. 


군중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건들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다위의 자손, 즉 메시야가 아니라면 어찌 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라고 이구동성으로 놀라며 예수의 뒤를 쫒았다. 아마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메시야의 사역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나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을 떠올렸을 것이며 예수의 사역중 일어나는 치유 사건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사야의 예언 성취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후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사진: 쥐염나무 열매


여기에 반대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 역시 환자들이 치유받고 귀신들이 내쫓김을 당하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군중들의 반응과는 달리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들 내쫓는다고 속으로만 주장하였다. 어쩌면 겉으로 그들의 생각을 발설하기에는 주변 무리들이 눈이 무서웠으리라. 


이때,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짧은 말씀을 하셨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스스로 분쟁하는 동네...스스로 분쟁하는 집마다 황폐해지고 서지 못하게 된다." 귀신의 힘의 귀신을 내어쫓는다면 사단의 왕국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가운데 세워가는, 그리고 확장해 가는 세포(cell)와 같은 존재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세포들이 이 세상에 더 많이 존재하면 할 수록 그 나라는 확장되어 가며, 그 나라의 최고 목표인 영혼들의 구원은 더 속도를 낼 수 있다. 교회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갖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명이 분명하다면 교회들은 경쟁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이다. 축구로 말하면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필드에 서 있는 선수들이다. 




사진: 엉겅퀴



사진: 마른 엉겅퀴



사진: 엉겅퀴와 겨자풀 


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은 반드시 같은 목적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팀워크 (Team work)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팀의 조직력이 약하거나 와해된다면 팀은 그 경기를 절대적으로 이길 수가 없다. 사단이 감독으로 있는 왕국의 조직력, 그리고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빼앗기지 않는것! 이것이 사단이 감독으로 있는 나라의 절대적 목적이다. 


경기장에 나선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들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야 한다. 만일 두개 혹은 세가지 서로 일치되지 않는 목적들을 갖고 있다면 그 경기에서 패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공통 목적을 가지고 사역을 하며 교인들에게도 동일한 목적을 갖고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변에 교회들이 개척되고 복음이 전해지는 것, 그리고 교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함께 격려해주고 박수를 쳐주며 환영해야 하는 것이 숨을 쉬는것 이상으로 자연스런 반응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이상적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회 생활에서는 "경쟁" 이라는 말과 그 속에 담긴 의미가 현실속에서 행동으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동종의 가게들이 주변에 개업을 한다면 기존의 사업주들은 긴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동종의 가게 업주들과 협력하기는 쉽지 않다. 오래전애 사역하던 교회 주변에 작은 구멍가게 두개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한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가격을 내리니 다른 가게도 가격 인하를 대폭하였다. 그 가게들은 손님들을 상대방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제살깍기를 한 것이다. 손님들 입장에서야 싼 가격에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었겠으나, 가게 업주들은 마진이 적은 혹은 심지어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상대방과 경쟁을 한 것이다. 결국에는 둘다 망하는 것인줄을 모르고 말이다. 




사진: 물가에 심겨진 에셀 나무 


만일 교회가 이 두 가게 업주들처럼 다른 교회들과 경쟁한다면 교회와 세상 사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교회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목회자와 성들들이 반드시 뛰어넘어야 혹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다면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경쟁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 다른 교회가 개척되고 성장하는 것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춤을 추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또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세상 가게들의 경쟁 관계로만 보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 스스로 분쟁하는 집들은 서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사단의 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연자맷돌과 올리브 기름틀

Church Story 2013.03.23 15:14 Posted by Israel

연자맷돌과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은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추구해야할 비전을 알려주는 좋은 교보재이다. 연자맷돌하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떠 오른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눅 17:2)" 연자맷돌을 목에 매어 수장시켜 처형시키는 방법은 고대 헬라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처형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연자맷돌은 올리브 기름을 짜기 위한 필수 도구였다.

 

 

사진: 겟세마네 교회 정원의 올리브 나무

 

이스라엘의 성서 관련 유적지들에는 연자맷돌과 올리브 기름틀이 함께 놓여 있는데, 연자맷돌은 올리브 기름을 생산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도구이다. 한해 동안 열심히 올리브 농사를 지은 농부는 가을 (9-10 월경)에 올리브 열매를 추수한다. 같은 나무에서 자라나지만 모든 열매가 동일한 크기와 모양을 갖고 있지는 않다. 크고, 작고, 잘 생기고, 못생기고, 예쁘고, 약간 썩은 것도 있고, 새가 쪼아 먹은 것도 있다. 성서 시대의 농부는 막대기로 올리브 나무 가지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그러다보면 열매에 없던 상처도 생기게 마련이고, 땅에 떨어진 올리브는 흙과 먼지에 묻는다.

 

올리브 열매를 딴 후 농부는 물로 흙과 먼지를 닦아내고 연자맷돌에 넣고 한번 으깨준다. 올리브 열매는 단단해서 으깨지지 않은 올리브 열매를 망에 넣고 기름을 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자맷돌속에 들어간 올리브는 육중한 돌 무게로 인해 그 형체가 으깨진다. 농부는 으깨진 그 열매들을 기름틀 위에 설치된 망에 넣고 지랫대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낸다. 으깨진 열매들은 서로 서로 비벼대면서, 그 열매속에 있는 물과 기름 (올리브 열매의 80% 정도는 물이다)을 빼내기 시작한다. 기름틀 안에 움푹 파진 돌 항아리속에 들어간 기름과 물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물은 가라앉고 기름은 위에 뜬다.

 

 

사진: 연자맷돌과 올리브 기름틀

 

 

자! 여기서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추구해야할 비전을 배울 수 있다. 올리브 나무에 달린 열매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나무에 달려 있을때는 각각의 생김새와 크기가 다른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들 자기들만의 색깔이 있다. 삶의 배경, 성격, 지식 수준, 생활 수준, 직업 등등 모든 것들이 다르다. 이제 농부가 열매를 따서 연자맷돌에 넣고 으깰때, 농부에게 올리브 열매의 생김새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농부의 목적은 기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각각 나름대로의 모양이 있지만 말씀이라는 연자맷돌에 으깨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그 과정중에 있다. 같은 나무에서 자란 열매가 그 크기와 모양이 다르듯,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어가는 속도 역시 다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고로 서로를 향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이 없다. 조금은 빠르게, 조금은 늦게 자라지만 결국에는 자라게 되어 있고 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부가 마늘을  막자사발이나 절구에 넣고 찧다 보면, 어떤 마늘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높이뛰기를 하듯 도망가지만 주부의 손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주부는 탈출한 마늘을 잡아서 다시 절구통에 넣고 사정없이 찧어 으깬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앞에 서게 되고, 그 말씀을 듣다 보면 어느새 옛사람의 성품과 생활이 죽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한번 으깨진 올리브 열매는 원래 형체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제는 기름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이다. 망에 넣어진 으깨진 열매들이 기름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서로 비벼대는 단계가 필요하다. 홀로 있어서는 절대 기름이 될 수가 없다. 촘촘한 망속에 있는 동안 지랫대에 묵직한 돌이 달리게 되고 망은 내려앉고 올리브는 서로 비벼대면서 기름으로 변한다. 예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고 성결케 되는 과정도 이와 같다. 혼자서 되는 것은 없다. 교회 공동체내의 다른 예수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격려하고 권면하며 기도해주는 동안, (물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한다) 예수의 사람들이 추구해야할 최종 목표인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사진: 팔복교회 산비탈길 - 예수의 길

 

 

기름틀속에 있는 기름이 물과 분리가 되듯, 예수의 사람들 역시 세상과 구분된 삶의 모습을 나태내기 마련이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밟아가는 지극히 정상적인 신앙의 단계이다. 우리의 교회에는 아직 추수하기에는 덜 익은 올리브도, 추수기가 된 올리브도, 연자맷돌에 으깨지고 있는 올리브도, 연자맷돌에서 으깨지기 싫어 도망하려는 올리브도, 으깨져서 망속에서 서로 비벼대는 올리브도, 기름이 되어 물과 분리된 올리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과정들을 거쳐가면서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렀을때, 주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분명히 알아볼 것이다. 자녀가 그 부모를 닮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예수의 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지 않는다면 누구를 닮아갈 수 있겠는가? 모두가 다름에서 출발하였지만, 연자맷돌과 올리브 기름틀이라는 교회 공동체속에 있는 예수의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예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그날 그 영광스런 나라에 서게 될 것이다.  

 

 

 

 

성을 만드는 자와 길을 내는 자

Church Story 2013.02.10 03:22 Posted by Israel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 그러나 길을 만드는 자는 흥한다" 툰엔쿠크

 

툰엔쿠크의 비문에 적인 이 글귀는 흔히 도전과 개방을 표현할때 많이 인용되는 말이다. 인류 역사와 성서의 역사를 살펴 보면, 성을 쌓는 자는 결국 망하였다. 그 어떤 철옹성도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성서에 등장하는 여리고 성은 이중 성벽으로 되어 있었고, 헤롯이 만든 맛사다는 사방이 깊은 계곡으로 되어 있어 적들이 접근할 수 없는 천연 요세였다. 예루살렘 성 역시 북쪽을 제외하고는 기드론과 힌놈 골짜기로 둘러쌓여 있는 요세였다. 그러나, 결국 이 성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유적 발굴 현장에는 "텔 (tel/tell)" 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이 텔은 성의 건축과 파괴의 반복으로 인해 생긴 언덕이다. 그 언덕을 파내려가 보면, 옛 시대의 영웅들이 남긴 돌들의 흔적들, 무너진 성들의 층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남긴 업적은 성들을 쌓은 것들이다. 그의 정치 생활 40년 중, 그는 성전 공사 7년, 자신이 거할 궁전 건축에 14년을 보냈고, 게셀, 므깃도, 그리고 하솔에 성을 건축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였고 성전산과 다윗성 사이에 "밀로"를, 벧호론에 성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왕상 9:15-22). 성을 건축하기 위해 많은 역군들을 동원하였는데, 결국 그가 죽고 나서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유들중 하나는 솔로몬이 성들을 건축하기 위해 동원하였던 노역 때문이었다. 그가 건축하였던 성들은 훗날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에는 무너져 버렸고, 그 무너진 터 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무너질 성을 쌓았다.

 

무너질 성들을 쌓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길을 만든다. 그 무엇이든지 시작은 반드시 있다. 그 옛날 누군가는 길을 만들었다. 누가 그 길을 만들었는지는 알아주지 않겠지만 그가 만들었던 그 길을 따라서 누군가 걸었을 것이며, 그 발걸음이 남긴 흔적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이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길은 단단해졌고 넓어졌으며, 오솔길이, 마차가 다니는 길로, 그리고 문명의 발달과 함께 기차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되었다.

 

 

사진: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베두인 여인들

 

성서의 세계속에서도 길들이 등장한다. 해변의 길 (비아 마리스), 왕의 대로 그리고 족장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걸었던 이스라엘 중앙 산악 지역을 따라 난 족장의 길은 성서 인물들의 역사적 발자취가 남아 있는 길들이다. 그 길들은 파괴가 아닌 발전 단계를 거쳐 여전히 남아 있으며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광야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혹은 지나간 흔적이 있는 길을 걸었을까? 출 33장은 그들이 시내산을 떠나 길을 행할때, 여호와께서 친히 함께 가리라 (출 33:12절 이하)라는 말씀과 구름이 백성들 앞서서 길을 안내하였다는 말씀 (민 9:15절 이하)이 있다. 이로 보건데, 광야 40년 여정중 길의 안내자, 길의 개척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하나님이셨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길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었다.

 

성서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들과 함께 메시야의 길을 소개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요 1:23)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광야에서 예비하였다.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의 유대 사회는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하였기에, 그가 도심지 한복판에서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 한들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백성들의 대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광야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세례 요한이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다는 유대 광야는 당시 종교와 정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다. 그가 만일 여리고 주변 유대 광야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다면 거리상 약 30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이었고, 여리고 동편 요단강 근처 베다니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다면 이보다 약 5 킬로미터 정도 더 떨어진 곳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과 유대 여러 동네에서, 그리고 심지어 갈릴리 바다 근처 (세례 요한의 사역지로부터 약 140 킬로미터 떨어진 곳/ 세례 요한은 살렘에서 가까운 "에논"에서도 사역을 하였는데 이곳은 벳샨에서 약 10 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지역이며 갈릴리 바다 근처 벳세다에서는 약 50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에서도 세례 요한을 찾아왔다.

 

 

사진: 유대 광야 - 지워진 이정표만이 서 있다.

 

그 메시야의 길은, 세리들과 군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 조차도 세례 요한에게 그들의 추종자들을 보내었다. 그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시야 되시는 예수께서 그가 예비한 길을 따라서 요단강에 오셨다. 메시야가 오신 곳, 메시야를 만난 곳은 도심지 한복판이나 당시 종교인들이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고 여겼던 성전산이 아닌 거친 광야였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화려함을 자랑하였던 성전산의 성전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들을 수 없었던 생명의 말씀이 있는 현장 광야. 그 광야로 그 생명의 메시야를 찾아 사람들은 몰려 들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순례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교회들은 어제의 흔적만을 자랑하는 교회들이다. 무너질 성들을 건축하였던 이들처럼, 많은 교회들 역시 무너졌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 글에서 말하는 교회는 외관상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다행히도 그 무너져 버린 교회들속에서 우리는 생명있는 복음을 찾고 만난다. 교회 건물은 "성"과 같으며 교회의 복음은 "길"과 같은 것이다. 만일 교회에 그 복음이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것이며 결국 무너진다. 교회가 성처럼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을 보이려 한다면, 역사가 던져주는 무너져내린 성들, 먼지 구덩이속에 파묻혀버린 성들의 역사를 주목해야 한다. 성은 무너졌다. 무너진 성들은 어느 정도 찾는이들에게 감동을 주지만, 복음이 없어 무너진 교회들은 이미 생명을 잃었기에, 유통기한이 지난 썪은 우유와 같은 것이다. 그 누구도 어제의 날씨를 보고 내일 입을 옷이나 우산을 준비하지는 않는다. 복음이 없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과연 우리는 복음이라는 길을 만드는 예수의 사람인지, 복음을 잃어버린, 혹은 그 복음을 잃어가는 교회 건물만을 자랑하는 예수의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