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앞 멸망 산

Biblical Site 2013.09.27 07:50 Posted by Israel

"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왕하 23:13)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왕상 11:4-7)


솔로몬은 생전에 예루살렘 앞 산에 이방 신들을 위한 산당을 세웠다. 그때가 대략 기원전 940년쯤이었는데, 훗날 요시야가 왕좌에 앉았던 620년대에까지 약 300여년 동안 그 산당은 건재하였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산당을 세웠던 예루살렘 앞 산은 어디에 있을까? 


예루살렘은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모리아 산은 창세기 22장과 역대하 3장 1절에 나오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라는 말씀, 그리고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으로부터 구입한 타작 마당이 바로 그 모리아 산이라는 역대기 저자 (대하 3:1)의 말에 근거하여 솔로몬의 성전 자리는 현재의 성전산 (Mt of Temple)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성전산, 즉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마주보고 있는 산이 북동쪽과 동쪽으로 연결된 산인데 바로 올리브 산 (한글 성서에서는 "감람산")이다. 올리브 산은 산 봉우리가 3개인데, 북동쪽에 스코푸스 산 (Mt. Scopus, 826m), 동쪽에 올리브 산 (Mount of Olive, 818m) 그리고 동남쪽에 멸망 산 (Mt. Destruction, 747m) 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앞에 있는 멸망 산은 이 3개의 봉우리들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역대기 저자는 좀더 구체적으로 솔로몬의 산당 위치를 알려준다.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 즉  솔로몬의 산당이 있었던 곳은 올리브 산 오른쪽이다. 그렇다면 왜 올리브 산 오른편 봉우리를 멸망의 산으로 불렀을까? 




사진: 19세기 예루살렘과 올리브 산 전경 


성서에는 멸망의 산 (הר המשחית) 라는 표현이 세번 등장한다. (왕하 23:13; 렘 51:25; 대하 20:23) 이중 예레미야서는 바벨론을 지칭해서 멸망의 산이라 하였고, 역대하 20장은 여호사밧과 모암, 암몬, 마온사람들과의 전쟁 이야기중에 등장하는데, 특정한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이방 백성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살육을 표현하느데 사용되었다. 


유일하게 왕하 23장에서만 등장하는 멸망의 산... 왜 멸망의 산이라 부르는가? 




사진: 19세기 예루살렘과 올리브산 전경 





사진: 멸망산과 실로완(실로암) 마을


히브리어 משחית(마쉬히트)는 어원상 משחה (마쉬하)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Anoiting (기름부음) 혹은  Oil (기름)의 의미이다. 멸망의 산의 다른 지명인 올리브 산은 성서 시대에 올리브 농사를 짓던 장소로, 올리브를 재배하는 농부들이 그 현장에서 올리브유(Olive Oil)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멸망의 산을 어원적으로 볼때 기름을 생산하는 올리브 산과 연관성이 있다. 


이 משחית 가 부정적 의미를 지닌 "멸망"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올리브산은 솔로몬 왕의 우상 숭배지였고, 요시야 시대 당시에도 솔로몬의 산당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일으키며 솔로몬의 산당을 파괴하였다. (왕하 23:13) 원래부터 올리브 산의 또 다른 명칭이 멸망의 산이 아니었으나, 요시야에 의해 파괴된 솔로몬의 우상 숭배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지명 הר משחית (멸명의 산) 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성서의 지명, 혹은 사람의 이름은 그 땅과 사람의 역사(history)의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아담(אדם)은 그가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창 3:19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שובך אל האדמה)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라고 말씀하신다. 


아담(אדם) = 흙 (אדמה) 


창세기에서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여호와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초하셨을때, 아담은 그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창 2:23)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איש)이며 여자는 이샤(אשה)이다. 여기서 "ה"(헤이)는 방향성의 의미가 있는데, 위 아담의 예에서도 흙이라는 단어의 끝에 "ה"가 붙어 있고 여자에게도 "ה"가 붙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최초 아담(남성)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다음 세대부터는 여자(אשה)로부터 자녀들이 나온다는 것을 방향을 의미하는 "ה"는 내포하고 있다. 


남자(איש) ---- 여자 (אשה)


스가랴 선지자는 예루살렘 앞에 있는 멸망의 산(올리브 산)에 있을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에 관한 예언을 하였다. 그 예언에 의하면,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올리브 산에 서실 것이요"(14:4) 라는 표현이 나오며,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14:12)는 종말론적 표현이 등장한다. 


이로 보건데, 올리브 산은 원래 올리브유를 생산하는 곳이었으나, 훗날 성서 저자들은 솔로몬의 이방 신들을 위한 산당, 그리고 요시야의 산당 파괴를 히브리어의 언어 유희적 특수성을 활용하여, 멸망의 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고, 과거 우상 숭배지를 파괴하였던 그 올리브 산을 여호와께서 이방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을 스가랴는 종말론적인 심판 장소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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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은 어디에 있는가?

Biblical Site 2013.07.17 06:18 Posted by Israel

소돔! 


이스라엘 성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소돔이라 불리는 땅은 사해 남단에 위치해 있다. 흔히 롯의 아내가 소금 기등으로 알려진 이 흙과 돌이 뒤섞인 기둥은 사실 산지 위쪽에 있던 동굴이 무너지면서 만들어진 기둥일 뿐이지 수천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롯의 처는 아니다 (참조 How Lot's Wife Became a Pillar of Salt," Biblical Archaelogy Review May/June 2009)




사진: 롯의 처의 기동(???)


이 세상에 많은 경전들이 있지만, 성서만의 독특함은 성서속의 인물들의 삶의 히스토리가 특정한 땅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돔 사건 역시 성서 저자는 그 소돔의 지리적 특징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창세기 13장을 보자. 13장은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애굽에서 돌아온 후 그들의 가축을 먹을만한 충분한 초지가 부족하여 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아브라함과 롯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있었다. 먼저 선택권을 받은 롯은 그가 있던 자리에서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다 (창 13:10).


지리적으로 벧엘은 산지이므로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요단 지역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이(Ai)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목축을 하던 목자들은 주로 산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목양을 했으므로 아이 역시 요단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요단 지역을 조망한 롯에 대해 성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사진: 벧엘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당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이 구절에서 성서 저자는 세가지를 알고 있었다.

 

1. 요단 지역에는 물이 넉넉하였다. 

2.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

3. 요단 지역은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 같았다. 


실제로 요단 지역은 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갈릴리에서 흘러 내려 사해 (성서에서는 염해)로 들어가는 물줄기가 있어 강 주변은 늘 초지가 자란다. 요단강이 있는 계곡길을 따라 사해쪽에서 북쪽 갈릴리로 올라가다보면 계곡 안쪽에 있는 요단강 주변에 밭농사가 매우 발달된 현장을 볼 수 있다. 


롯은 요단 지역을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 땅과 비교를 하는데, 이 두 지역의 특징은 물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창 2장 10절 이하에서 저자는 에덴 동산 주변에 흐르는 강줄기를 소개한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롯이 에덴 동산에 흐르는 네개의 강 명칭을 알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에덴 동산에 물이 풍부하였다는 사실만큼은 그가 알았을 것이다.



사진: 요단강 주변의 키카르


또한 롯은 애굽땅에 흐르는 나일강을 알고 있었다. 롯은 얼마전 애굽 땅을 다녀왔다 (창 12장). 틀림없이 그는 애굽의 중심부를 지나 델타 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나일강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애굽 땅과 같았더라" 라는 표현을 요단 지역을 바라보면서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롯이 최종적으로 정착을 한 소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소돔은 과연 어디일까? 고고학자들은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주장한다. 최근 성서 고고학 잡지인 Biblical Archaeology Review (3/4월호)에서, Steven Collins라는 학자는 요단 지역에 있는 소돔을 사해 북단에 있는 텔 엘-함만 (Tell El-Hamman)을 소돔으로 추정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창 13장 10에 나오는 요단 지역을 영어 성서는 Plain 으로 번역을 하였지만, "지역"의 히브리어인 키카르 (혹은 하 키카르)는 평원이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지만, 둥근 지역, 마치 음악 Disk와 같은 모양을 뜻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이 둥근 지역에는 요단강 서편에 있는 여리고, 그리고 요단 동편에 있는 엘 함만, 엘 니므린, 엘 카파린 등이 포함되는데, 저자의 말대로 이 지역들은 주변의 다른 지역들보다 물이 풍부한 지역들이다. 게다가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있었던 롯이 실제적으로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이 되기도 한다. 







사진: 여리고 지역


스티브 콜린스는 텔 엘-함만의 고대 유적 발굴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하는데, 이 지역은 구석시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 매우 발달된 도시 형태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별히 중기 청동시 시대의 흔적에는 불에 타서 파괴된 흔적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Where is Sodom? Mar/Apr 2013,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013)


또 다른 주장은 사해 남단을 주장하기도 한다. William F. Albright와 브렌 우드 등이 주장하는 것인데, 성서 택스트의 내용, 즉 창 13:12에 나오는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라는 표현에서 나오는 것처럼 롯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는 구절. 그리고 사해 남단 (요단 동편)에서 발굴된 현장들 중에는 불에 탄 도시의 흔적들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해 남단을 주장하기도 한다. 


아브라함과 롯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약 2천년 후 예수께서는 회개치 아니하는 가버나옴, 벳세다, 그리고 고라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4) 라는 책망을 하신다. 예수께서도 소돔이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도시였으며, 그 도시가 멸망받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소돔 지역을 위해 중보할때, 의인 열명이 있다면 그 죄악으로 관영하던 도시가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의인 열명이 없었다. 그리고 소돔은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소돔 이상의 죄악으로 관영한 시대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시대이다 (롬 2:4). 과거의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점점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죄악을 즐기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악과 타락의 수위가 올라가는 것은 늘 있어왔던 일이고 그 타락의 속도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빨라질 것이다.


세상의 죄악과 타락의 정도에 대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느낌, 반응이 점점 무디어져 가고 있는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이 시대의 현실이다.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보고 듣는 죄악이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죄악이 자연스러운 시대이다. 타락하는 세상을 향해,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를 향한 눈물샘이 막혀가고 있다. 과거 목숨을 걸고 회개를 외쳤던, 선지자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소돔가운데 함께 묻혀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예수의 기도가 있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 17: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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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땅을 통해 성서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3D 영화를 보는듯 그 재미가 특별하다. 예를 들어, 엘리멜렉과 나오미, 말론과 기론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들어가 기거하였다 라고 룻기서 저자는 설명하는데, 과연 어떤 길을 통해 모압땅으로 갔고 돌아왔을까? 성서는 엘리멜렉 가족의 구체적인 이동 경로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길을 따라 모압으로,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흔히 이스라엘은 광야 여행자들의 천국이라 불릴만큼 "걸어서 광야의 세계속으로"의 길들이 많이 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의 길도 있을까? 물론 성서 시대의 모압이 현재는 요르단 땅이기 때문에 직접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까지 걷는 체험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의 길을 어느 정도 따라 걸을 수는 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길들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1. 베들레헴(주황색) - 예루살렘 - 마알레 아둠밈 길 (아둠밈 비탈길 - 수 15:7, 본 블러그의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참조) - 여리고 - 요단강 도하 - 사해 남쪽으로 이동 - 모압 지방 (아래 사진 파란색 선)


2. 베들레헴(주황색) - 드고아 - 엔게디 (사해) - 사해 도하 - 모압 지방. (아래 사진 노란색선)




사진: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땅 이주


이 두개의 길들중 어느 길을 선택해서 엘리멜렉은 그 가족을 이끌고 모압으로 갔으며 나오미는 그 자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까? 모압과 요단강 건너 이스라엘 땅 사이의 이동과 관련된 다른 성서 이야기들을 통해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추정할 수가 있다. 


A. 다윗의 피난 경로 (삼상 22장)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닐때, 아둘람 굴로 도망을 하였다가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삼상 22:3). 아둘람 굴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광야 지역에 위치해 있다. 아둘람 굴에서 모압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울이 살고 있던 기브아 (예루살렘 북쪽)에서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 - 드고아 - 엔게디 - 사해 도하 - 모압으로 가는 것이 가장 짧은 루트이다. 

만약, 다윗이 예루살렘 - 마알레 아둠밈 - 여리고 방향으로 가려 하였다면 그는 죽음을 자초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루트는 사울의 기브아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사진: 엔게디 



사진: 엔게디의 사반 (잠 30:26)


B. 여호사밧과 아람 사이의 전쟁 (대하 20장)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아람의 연합군이 사해 건너편 엔게디 (하사손다말 -대하 20:2)에 주둔지를 만들고 여호사밧을 공격하려 할때,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함께 드고아 들로 나아간다 (대하 20:20). 드고아 들은 엔게디로 내려가는 광야 길에 위치해 있다. 이방의 연합군은 사해를 건너 엔게디로 이동하였는데 사해 중간에는 리숀 반도라고 해서 물의 깊이가 아주 낮아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건널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해의 수위가 낮아져서 사해가 리숀 반도를 중심으로 사해가 두개로 나누어져 있다) 만약 아람 군대가 사해의 리숀 반도를 건너올 수 없었다면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방향으로 진격해 올라왔을 것이다. 




사진: 엔게디의 산양


이 두가지 예들은 엘리멜렉 가족이 1번 루트보다는 2번 루트를 따라 모압 지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지지한다. 오늘날 베들레헴에서 출발해서 광야 길을 따라 엔게디까지 걸으면 약 12-15 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광야의 길을 걷는 것이 어렵지만 이 광야 계곡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드론 시내의 물이 흘러 사해로 유입되기에 물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진: 예루살렘-베들레헴- 광야 - 엔게디 - 사해로 빠져나가는 계곡의 물 



사진: 마르샤바 수도원 


엘리멜렉 가족은 잠시 우거하기 위해 모압으로 떠났다. 아마 당시 모압 지방에는 흉년이 들지 않았을 것이고 베들레헴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압 땅은 과거 아브라함을 떠나 요단을 건넜던 롯이 찬양하였던 그런 땅이었을 것이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오늘날도 요단 동편은 물이 풍부하고 늘 푸르다. 베들레헴에서 바라봤던 그 풍요로운 땅에 잠시 머물기 위해 떠났던 엘리멜렉 가족은 그 뒤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그 땅에서 죽음의 슬픔을 끌어 안고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의 삶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셨다. 반전이 있는 인생 드라마를 쓰신 하나님의 자비가 곳곳에 배어 있는 이야기가 룻기 아니던가. 




사진: 엔게디의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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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Biblical Site 2013.06.11 07:25 Posted by Israel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눅 10:30) 


성서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반대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히브리어로 "마알레 아둠밈" (아둠밈 비탈길 - 수 15:7) 이라고 한다. 마알레 라는 뜻은 "올라간다" 라는 의미가 있고 아둠밈은 "붉다" 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마알레 아둠밈은 붉은 비탈길로 해석할 수 있다. 성서 이야기속에 마알레 아둠밈은 중요한 몇가지 사건에 등장한다. 


기브온 족속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속이고 스스로 종이 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둔하고 있던 길갈에서 불과 사흘 길 떨어진 예루살렘 북서쪽에 살고 있었다 (수 9:16). 성서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기브온 땅을 출발한 사신들은 마알레 아둠밈을 거쳐서 길갈에 도착하였다. 반대로 기브온 주민을 예루살렘의 5개 부족국가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전쟁에 나섰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마알레 아둠밈을 거쳐서 예루살렘 방향으로 진격해 갔다 (수 10장). 




사진: 파란색 - 요단 동편 - 여리고 - 와디 켈트 - 마알레 아둠밈 - 예루살렘으로 가는 고대 길. 주황색 - 현재 이용하는 도로 (예루살렘 - 여리고), 검은 점 - 여인숙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인숙). 마알레 아둠밈 길은 여인숙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말함. 


마알레 아둠밈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이 되는 산 비탈이었다. (수 15:7) 또한 다윗은 쿠데타를 일으킨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서 모압 땅으로 도망을 갈때 역시 마알레 아둠밈을 거쳐서 여리고 방향으로 내려가 요단을 건너갔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삼하 15:30).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멸망을 당할 당시의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성안에 양식이 다 떨어지고 느브갓네살의 공격으로 인해 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왕의 동산 곁문 길을 따라 여리고 평지로 도망을 갔다가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붙잡히게 되는데 그 역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인 마알레 아둠밈 길을 따라 내려갔다. (왕하 25:1-5). 









사진: 벳바게 마을 -멀리 유대 광야가 보입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도 마알레 아둠밈은 등장한다. 물론 직접적으로 누가는 마알레 아둠밈 길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당시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오고 갈 수 있는 가장 짧은 길은 마알레 아둠밈을 거쳐가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 그리고 아는 것과 생활속에서 그 아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마알레 아둠밈 길을 따라 내려가던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해 준다. 


예수 시대 당시 마알레 아둠밈 (붉은 비탈길)은 다른 말로 "피로 가득한 길" 혹은 "피의 밭"으로 불렸다. 현실 속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상속의 공포 영화 제목같겠지만 당시 마알레 아둠밈 길은 그 이름답게, 그 길을 오고 가는 상인들과 순례자들에게는 극도로 위험한 길이었다. 로마 정부의 압제속에 세금을 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마알레 아둠밈 길 주변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오고 가는 사람들의 물건을 강탈하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는 일들이 있었다. 비쟌틴 시대에는 마알레 아둠밈 (붉은 비탈길) 길에 수비대를 두고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해야 할 정도였다. 


성서 시대 당시와 비쟌틴 시대에는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오고가는 마알레 아둠밈길 중간에는 여인숙이 있었다.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인숙으로 알려진 이 여인숙은 눅 10장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 여인숙은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중간 지점에 있어 순례자들과 상인들이 오고 가면서 하룻밤을 쉬어 갈 수가 있었다. 해가 질무렵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간다든지, 여리고로 내려가는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에 당시 사람들은 이 여인숙을 많이 애용하였다. 


사람들은 여리고로 내려갈때 계곡 길을 이용하였다. 와디 켈트로 이름 붙여진 계곡길 안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여리고 방향으로 흘러 내려가는 물줄기가 일내 내내 흘렀고 순례자들과 상인들은 시원한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는 와디 켈트 계곡길을 따라 여리고로 내려같다. 반대로 여인숙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머문 후에는 산지길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 성전은 올리브 산 너머에 있다. 따라서 순례자들은 올리브 산 동편에 있는 베다니와 벳바게를 거쳐서 올리브 산 정상에 도착한다. 그 산 정상에서 화려한 성전을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사진: 와디 켈트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


무사히 그 험악하고 위험한 마알레 아둠밈 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그들은 올리브 산 정상에 선 것이다. 그리고 성전을 보면서 그들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내려가는 도중에, 혹은 올라가는 도중에 원치 아니하는 강도를 만나 생명을 잃거나, 그들의 귀중품을 강탈당하였을 것이다. 


성서는 매우 실제적인 자비를 베푸는 삶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여 그 성읍내에 살고 있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성중에 거류하는 객, 고아, 과부를 구제하는 것이었다. 


분깃이나 기업이 없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백성들이 베푸는 자비의 구제를 통해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강도 만난 자를 돕지 않았던 그들은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랴" 라는 말씀을 망각하며 살았다. 










사진: 광야의 길 -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길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다. 



사진: 올리브 산 동편에 있는 아랍 마을 





사진: 여리고 전경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눅 17장 11-) 


몇년전만 해도 사마리아 지역 특별히 제닌(Jenin)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곳곳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가 있었고, 까다로운 검문 절차를 받고 나서야 들어갈 수가 있었다. 현대판 성서 시대를 다시 보는 듯 하였다. 왜냐하면 성서 시대에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서 예루살렘이나 갈릴리 지역으로 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였고 통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과의 역사적이며 종교적인 갈등은 점점 증폭되었고 갈릴리의 순례자들은 어쩔 수 없이 요단 동편길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곤 하였다. 최근 이스라엘 검문소사 철폐된 이후, 사마리아 지역 안쪽까지 직접 차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쉬워졌다. 요단 서안 지역내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그 지역내의 무슬림들 틈속에 예수의 제자들로 살아가는 이들도 직접 만날 수가 있다. 


성서 시대 열명의 나병환자 사건이 있었다는 부르킨에 다녀왔다. 열명의 나병환자 사건은 눅 17장 11절 이하에 등장한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주로 연대기적으로 예수의 사건을 기록하였으니, 17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순례는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 순례였으리라.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라는 본문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역 안쪽 깊숙이까지 들어가시지는 않은 듯 하다. 누가는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 사이에 있는 "한 마을"에 예수께서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사진 (구글 맵 이미지): 붉은색 원(Burqin - 열명의 나병환자 사건 현장). 파란색 - 이스르엘 계곡, 연두색 - 벧산 평야, 붉은색 선 - 예수의 이동 경로 


일반적으로 성서 시대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에 마을을 만들지는 않는다. 산지가 많은 이스라엘에서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농지 확보가 중요하였기에 마들은 산비탈이나 산지 위쪽에 만들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마태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는 표현하는데 이는 당시 산 위에 마을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사마리아 지역과 갈릴리 지역 사이에는 이스르엘 평야 (혹은 계곡)과 벳샨 평야가 있다. 성서 시대의 도시나 마을이 주로 산지 위쪽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갔다는 말에 적용을 시켜보면 예수께서는 그 마을을 의도적으로 찾아 들어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벳샨 평야길을 따라 요단 동편으로 가셔야 하는 분이 굳이 평야의 좋은 길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산지 위쪽에 있는 마을까지 들어가셔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는 예수께서 그 마을을 의도적으로 찾아 들어가신 이유를 이어서 설명한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 17:12-13), 


ελεεω (긍휼).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엘레오"는 주로 병자들이 자신들의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할 때 사용되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예수의 불쌍히 여김만이 필요하였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에 있는 한 마을에 있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 긍휼을 예수께서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말한대로 예수께서 의도하지 않으셨다면 산지 위쪽에 있는 그 마을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불쌍히 여김, 긍휼을 준비하셨고 그 산지 위쪽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전통적으로 예수께서 올라가셨던 산지 위쪽에 있는 마을은 부르킨(Burqin)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세운 작은 교회가 산비탈에 위치해 있으며 비쟌틴 시대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열명의 문둥병자 사건이 있던 곳에 방문을 하였고 그 당시 그녀가 앉았었다는 돌 의자가 남아 있기도 하다. 


예수의 긍휼을 간구하였던 열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가는 도중에 깨끗이 치유함을 받았다. 그 열명의  나병환자들중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으니 아마 아홉몀은 갈릴리 지역에 있는 제사장을 찾아갔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도 그리심 산쪽으로 가려다가 자신의 몸이 치유받은 것을 알고 예수께로 돌아왔다. 





예수께 돌아온 그 사마리아인을 향해 예수께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 17:19). 아홉명의 나병환자들은 몸의 치유를 받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몸의 치유보다 더 값진 영혼의 치유를 받은 것이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찾으신 그 산지 위의 마을, 아마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으니 혹 비라도 내렸다면 산지 위로 올라가는 길은 질퍽하여 걷기가 불편하였을 것이고, 한 낮에 산지 위 마을을 향해 오르셨다면 꽤나 땀을 흘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의도적으로 그 한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기 위해,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가시던 길을 벗어나 산지로 오르셨고, 그 한 영혼이 찾아왔을 때 그 분은 아마 춤을 추셨을 것이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소중하니 말이다... 








사진: 부르킨 그리스 정교회 (열명의 문둥병자 사건 현장) 사진 제공은 이익상 목사님께서 해주셨습니다. www.bibla.co.il 



사마리아 지역

Biblical Site 2013.05.07 01:13 Posted by Israel

세겜!


아브라함 (아브람)이 그 아내 사라(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땅 (창 12:5-7).


훗날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나, 그녀와 수가성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땅 (요 4:1-42). 


그 세겜에 다녀왔다. 오랫동안 기억 주머니속에 너무 깊이 파묻혀 있던 땅 세겜. 지난 2005년경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통과해 팔레스타인 택시를 타고 성서의 땅들을 밟았었다. 그땐, 카메라가 없었는지라 눈으로 스켄만을 하고 기억 주머니속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있는데 무슬림이었던 팔레스타인 기사가 기도 시간이 되었다며 택시에서 내려 한 동안 기도를 하였고, 그 틈에 함께 동행하였던 이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길거리에서 해결한 것과 하나는 이스라엘 검문소에 다시 도착하였을때 기사 아저씨의 초긴장한 모습이다. 


2013년 4월 3일. 8년 만에 다시 들어가게 된 요단 서안 지역의 세겜. 그 땅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던 검문소는 폐쇄가 되었다. 이제는 이스라엘 차량 (노란색 번호판)을 타고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일이겠지만, 나와 같은 동양인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은 그 어떤 용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을 돌고 돌아보았지만, 주로 요단 계곡길을 따라서 그리고 지중해변의 샤론 평야길을 따라서 돌았다. 즉,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있는 중앙 산악 지역 그것도 요단 서안 지역의 내부 깊숙히는 들어가 볼 기회가 없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의 배려로 직접 그 땅을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번엔 기억 주머니에 의존할 수 없었기에 카메라를 준비했다. 문제는 그 카메라를 받쳐줄 광각랜즈가 반 영구 파업(?)을 하였기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애물 단지 카메라에 망원랜즈만을 들고  그 땅을 밟을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진: 붉은선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때 이용하셨던 길 (요단 동편길). 예수께서는 중앙 산악지역에 있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실 수가 없었다 (눅 9장 참조) 



사진: 붉은선 동그라미(???): Burqin (열명의 문둥병자 사건), Sebasta (사마리아), Nabulus (세겜)



요단 서안 지역 (The West Bank)에는 성서의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란를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 (אלון מורה) 아래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창 12:6-7). 그의 후손 야곱의 디나가 강간을 당한 땅이며, 그의 가족들이 소지하고 있던, 혹은 섬기던 이방 신상들과 고리 장식들을 묻었던 땅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였다 (창 35:4). 


세겜에서 북쪽으로 약 40여분을 달리면 요셉이 그 형들에게 붙잡혀서 애굽으로 팔려갔던 도단이 나타난다 (창 37장). 당시 도단은 국제 무역상들이 이용하던 무역로였다. 성서는 요셉을 사 갔던 이스마엘 사람들 (혹은 미디안 상인들)이 낙타에 향품과 유황, 그리고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가던 중이었다고 기록을 한다 (창 37:25). 


가나안 정복 기사를 다룬 여호수아서에도 세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호수아는 에발산에 제단을 쌓고 모세의 율법을 선포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연설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수 8:30 & 24:25). 혼란의 시기였던 사사 시대 당시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과 요담 사이의 사건에도 세겜은 등장하며 (삿 9장), 북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은 세겜에 성을 건축하였다 (왕상 12:25). 


신약 성서의 이야기속에서도 세겜과 요단 서안 지역은 매우 중요한 사건 현장으로 나타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그리고 수가 성 사람들과의 만남 (요 4장), 강도 만난 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눅 10장), 열명의 문둥병자 사건 (눅 17장), 그리고 예수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았던 사마리아인들 이야기 (눅 9:51-56). 무엇보다도, 사도행전 1장8절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전도 사역에도 등장을 한다.


첫 장소로 도착한 사마리아 (세바스티아 -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아구스도 (Augustus - 라틴어)의 헬라식 표현)는 여러 고고학적 층들이 섞여 있다. 아합의 아버지였던 오므리 (기원전 885-874)는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았으며, 그 아들 아합은 수도 사마리아를 크게 확장 시켰다. 훗날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기원전 722), 왕하 17장에 의하면 앗수르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헬라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 독립 왕조였던 하스모니안 왕조 당시 히루카누스는 사마리아 지역, 특히 그리심 산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의 신전터를 공격하여 파괴하였고 (기원전 108년) 이 사건으로 인해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오고 가던 길목에 있던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통과할 수 없게 되었다. 







무너진 성터가 남긴 과거의 흔적 소리를 뒤로 하고 텔 발라타 (Tel Balata)를 방문하였다. 텔 발라타는 고대 세겜 마을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여러 시대의 층들이 있는데, 중기 청동기 시대로부터 헬라 시대의 층이 남아 있는 유적지이다. 텔 발라타는 에발산과 그리심산, 모레산, 그리고 이타마르산에 둘러쌓여 있는 옛 도시이다. 텔 발라타는 수가성 여인이 물을 얻기 위해 정오에 걸었던 야곱의 우물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며 유적지 중심에는 여호수아 시대의 신전터가 남아 있으며 비스듬하게 깍여진 비문이 하나 남아 있다. 








사진: 비문 (여호수아의 비문일까??? 이스라엘 바르일란 대학 "하기" 교수는 이 비문이 여호수아의 비문이라고 주장을 한다) 




사진: 텔 발라타 전경 (www.tellbalata.com 에서 발췌한 사진)



사진: 텔 발라타 뒤 에발산에 있는 아랍 마을




사진: 에발산


야곱의 우물이 있다는 그리스 정교회는 들어갈 수는 있으나, 야곱의 우물은 사진 찍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아니, 어쩌면 사람을 가려가면서 찍게 혹은 못찍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진 찍는 것은 포기하고 우물 물만을 마시고 왔다. 그날 나는 더 이상 물을 마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한 말이 기억나서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사진: 세겜 (나블러스) 시내



사진: 나블러스 시장 









사진: 세겜 근처 아랍 마을 






사진: 세겜의 아이들 








사진: 부르킨(Burqin)그리스 정교회 (열명의 문둥병자 사건 교회 -눅 17장 - biblia.co.il 에서 발췌한 것임)



사진: 부르킨에서 바라본 갈릴리 지역 



사진: 요셉의 묘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요 11:54) 


예루살렘의 종교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라는 인물은 트러블 메이커 (Troublemaker)였다. 짭짤한 벌이가 되었던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의 상거래 현장을 뒤집어 엎어놓는가 (요 2:13-22) 하면, 이미 죽어서 나흘이 된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당시 유대 종교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베다니 마을은 예루살렘 동쪽산인 올리브 산 뒷편이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올리브 산을 넘어 예루살렘 성전산 (The Mount of Temple)과 그 주변 마을, 그리고 종교인들의 귀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그것도 4일만에 무덤에서 걸어 나왔고, 그가 무덤에서 수의로 둘둘 말린채로 나오는 모습을 유대인들이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유대인의 절기인 수전절 (성서의 절기가 아닌, 마카비 항쟁과 관련 있는 절기)때, 예수의 정체성 문제를 놓고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던중, 예수께서는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잡으려고 하였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해서 요한에게 처음 침례를 받았던 요단 강 저편 베다니 (요 1:28; 10:40)로 가셔서 머무셨다. 




*** 사진 설명: 1) 하늘색 (요단강), 2) 붉은색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 3) 파란색 (에브라임에서 베다니로 가는 길), 4) 노란색: 예수께서 지나가셨던던 길들: Taibe (에브라임); Beit El (벧엘); Jericho (여리고); Maale Adumin (베다니 옆 마을 / 현재 베다니는 "아자리야"로 불린다); 요단강 근처 노란색 동그라미 (요단강 베다니 침례터 - Ehud El Qaser)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이후에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피해서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는데, 최근 그 에브라임의 추정지인 "타이베 (Taiybe)"를 다녀왔다. 타이베는 약 1500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동네로 거의 100%의 거주민이 기독교인들이다. 마을내에는 여느 다른 아랍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슬람 사원들을 전혀 볼 수 없고, 반대로 이슬람 사원들이 곳곳에 있는 아랍 마을들속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당들을 흔히 볼 수 있는 마을이다. 타이베에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졌던 교회당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무너진 교회당 내부에는 누군가 다녀간 흔적들, 곳곳이 불에 탄 자국들과 마리아 상과 촛대들이 여기 저기 놓여져 있다. 




사진: 타이베 (성서의 에브라임) 마을 



사진: 타이베 



사진: 타이베에 남아 있는 교회터





타이베는 성서 시대의 에브라임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예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렸던 베다니로부터는  5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중앙 산악지역의 높은 산지에 있는 마을이다. 예수께서는 주로 산지와 계곡 길을 따라 이동하셨는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보면, 요단강 동편의 평지길을 따라 요단강 베다니 (Ehud El Qaser)를 거쳐 요단강을 건넌 후, 여리고로 입성하신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30 킬로미터를 넘으니, 아마 여리고에서 하룻밤을 묵으신 후에 계곡길 (Wadi Qelt)을 따라 아둠밈 비탈길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동네가 바로 올리브 산 뒤에 있는 베다니이다.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나사로집에 가서 머무시고, 올리브 산을 넘어 기드론 시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셨다. 




사진: 타이베 그리스 정교회 



사진: 기독교인들의 묘지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직전에 에브라임에 가서 머무셨다. 유월절 직전 광야의 길을 따라 제자들과 함께 길을 행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 분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광야의 아름다움을 직접 발로 밟으시면서 길을 행하셨다. 흡족하게 내린 비로 푸른 옷을 입은 광야에서 한가로히 풀을 뜯는 양떼들을 보시면서, 그 분께서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들, 그러나 인생의 창조자가 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배척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영혼들을 향한 슬픈 눈물을 그 광야에 떨구면서 에브라임으로 피해 가셨을 것이다. 




사진: 타이베에서 바라본 유대 광야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6-27). 


빈들 가까운 에브라임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던 예수께서는 며칠 지나지 않아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고, 그 유월절 식사를 한후 결국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사진: 목자와 양떼 




물의 동함을 기다렸으나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나 소망없이 하루 하루를 살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았던 사건의 현장 베데스다(아람어로 베이트 하스다, 히브리어로는 베이트 헤세드).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비, 은혜의 집"이라는 아름다운 뜻이 있는 곳이지만 그 곳은 처절한 경쟁, 남을 밟고 넘어가지 않고는 치유를 받을 수 없기에 반드시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하는 곳, 자비와 은혜가 무색한 현장이었다. 38년된 병자의 깊은 절망속에 나오는 하소연은 처절한 경쟁으로 점철된 자비의 집의 현실을 증거한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7). 


38년 된 병자가 물이 움직이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물이 움직일때 마다 물이 있는 곳으로 가려하였으나, 그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보다 건강한 사람들과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곤 하였다. 그때 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절망의 늪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38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는 쉬고 싶지 않은 숨을 쉴수 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소망을 줄 수 없었고, 누구도 그럴 여유가 없는 곳이 베데스다, 자비의 집의 현실이었다. 




사진: 베데스다 


이 38년된 병자가 절망이라는 소망만을 붙잡고 있었던 베데스다는 어떤 곳이었을까? 자연적으로 형성된 연못이었을까?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든 물을 저수하는 곳이었을까? 만일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 저수지라면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일까? 


베데스다는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 저수지이다. 그렇다면 그 용도는 무엇일까?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두 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번째로 베데스다를 예루살렘의 생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인공 저수지라는 견해가 있다. 다른 견해로는, 생활 용수와 함께 미크베 (정결 의식탕)라는 복합적인 기능을 하는 곳이 베데스다 라고 주장한다. 


성서 본문, 요한복음 5장 2절은,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라고 말한다. "행각 다섯"이 있다는 말은 베데스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저수지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베데스다는 두개로 나누어져 있고 "행각 다섯"은 베데스다를 두개로 나누는 댐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사진: 베데스다 - 북쪽은 물 저수지로, 남쪽은 미크베로 사용되었다. 


7절 말씀을 보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라는 말씀을 통해 베데스다는 사람들이 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실제로 현재 베데스다를 가서 보면 그 옛날 계단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베데스다는 생활 용수를 위한 저수지였을까? 아니면 정결 의식을 의한 미크베와 생활 용수의 복합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저수지였을까? 




사진: 남쪽 미크베가 있었던 현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예루살렘의 물 부족 현상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영토 갈등 이상으로 물 부족으로 인한 공급 문제로 인한 심각한 갈등이 있다. 헤롯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당시에는 예루살렘에서 약 40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헤브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송수관 공사를 하여 물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 이전, 히스기야가 통치할 당시 앗수르의 공격이 있을때 기혼샘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적들이 끊기 전에 533 미터에 이르는 긴 터널을 만들어 물을 예루살렘 성내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사 22장 참조). 


우기철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비교적 많은 비가 내렸지만, 산지(약 750미터 고지)에 자리하고 있던 예루살렘은 인위적으로 저수지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직접적으로 해택을 받을 수 없는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는 곳곳에 물을 저수할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들어야 했는데, 베데스다는 바로 그 저수지들 중 하나였다. 계곡을 따라 흘려내리는 물을 저장하여 생활 용수로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이 생활 용수를 모아 두는 베데스다에 병자들이 모여 들었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할때 그 물로 들어갔다고 하자. 정수 시설이 없는 물에 병자들이 한꺼번에 들어간다면 아마 베데스다는 생활용수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학자들은 베데스다는 생활용수의 기능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행각 다섯"이 있는 베데스다, 고고학적으로 두개로 나누어진 베데스다. 그래서 남쪽에는 미크베의 역할을, 북쪽은 생활 용수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베데스다는 남쪽 미크베가 있었던 부분만을 발굴하였고, 이 미크베를 둘러싼 부분은 집들과 십자군 시대의 교회터, 그리고 로마 시대 치유의 여신 Asclepius의 신전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미크베로 다른 병자들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던 38년된 병자. 그에게 찾아온 예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라는 이 한 마디의 말에 38년 동안의 설움과 절망, 원망과 미움의 자리에서 그는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질병만을 치유한 것이 아니었다. 미크베를 통해서 정결 의식을 행하던 유대인들, 자신의 죄의 문제와 부정함을 씻기 위해 들어갔던 미크베, 베데스다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인간 본질의 죄 문제를 말씀으로 씻어 주신 현장이 바로 베데스다이다. 


참고문헌:Urban C. von Wahlde, The Puzzling Pool of Bethesda: Where Jesus cured the crippled man, BAR (Sep/Oct 2011). 

위 사진들은 BAR에서 다운로드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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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라사인가?

Biblical Site 2012.08.30 14:34 Posted by Israel

Kai« e˙lqo/ntoß aujtouv ei˙ß to\ pe÷ran ei˙ß th\n cw¿ran tw◊n Gadarhnw◊n


Kai« h™lqon ei˙ß to\ pe÷ran thvß qala¿sshß ei˙ß th\n cw¿ran tw◊n Gerashnw◊n 


Kai« kate÷pleusan ei˙ß th\n cw¿ran tw◊n Gerashnw◊n, h¢tiß e˙sti«n aÓntipe÷ra thvß Galilai÷aß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마 8.28)


예수께서 바다 건녀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막 5. 1)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눅 8. 26)


예수께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한 사건은 위 세 성경에 다 나온다. 특이한 점은 성서 기자들의 지명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말 성서에서는 가다라와 거라사로 기록되었지만, 실제 헬라어 성서는 3개의 다른 스펠링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헬라어 사본들을 살펴 보면 위 세개의 서로 다른 지명이 나오기 때문에 딱히 어느 것을 맞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오늘날도 동일한 지명이 각각 달리 불리는 경우들이 있기에 혹 고대 시대 당시 가다라와 거라사는 동일한 지명인데 호칭이 달랐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사진- 거라사 지역 


거라사 (혹은 가다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개의 추정지가 있는데 갈릴리 바다 동쪽 산비탈 지역과 현재 요르단에 있는 제라시를 그 추정지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서 본문의 지리 정보에 의하면 요르단의 제라시가 그 추정지가 되기는 어려운듯 하다. 예를 들면 위에 언급된 성서 본문은 예수께서 가신 거리사를 갈릴리 맞은편 이라고 되어 있다. 특히 막 5:2는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림이 무덤..." 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방문하셨던 거라사는 갈릴리 바다 동편 해변에서 아주 가까운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요르단의 제라시는 갈릴리 바다에서 약 50 킬로미터 동쪽으로 더 가야 한다. 


예수 시대 당시에는 약 16개의 선착장이 있었고 갈릴리 바다 동편에도 선착장이 있었다. 현재도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는 엔게브는 선착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엔게브에서 거라사 (히브리어로 쿠르시)는 약 10분 거리에 있다. 따라서 성서 본문의 정보와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었던 선착장을 근거로 하여 거라사는 갈릴리 바다 동쪽 해변 근처에 있던 마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 거라사의 거주민들은 누구였는가? 세 복음서 기자들 모두 "가다라 지방" 혹은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기록을 하는데, 이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살았다는 증거로 볼 수가 있다. 게다가 이들의 직업은 돼지를 사육하는 것이었으니 레위기법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한 돼지를 유대인들이 사육하였을리가 없다. 


예수 시대 당시의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서쪽에 "디베랴 도시"를 건설한다. 주로 갈릴리 바다 서쪽과 동쪽에는 이방인들이 거주하였고 북쪽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예수의 주 사역지인 가버나움, 고라신, 그리고 벳세다 역시 모두 갈릴리 바다 북쪽에 위치해 있다. 




사진 - 거라사 지역, 멀리 구름 아래로 보이는 곳이 갈릴리 바다 북서쪽


거라사 사건의 특이한 점은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막 5:1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눅 8:39) 이다. 예수께서는 치유와 귀신 축사를 행하신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조용하고 잠잠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거라사 사건에서는 치유를 받은 사람에게 명하기를 동네에 들어가서 전하라고 하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거라사인들은 예수께서 그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예수께서는 그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실 수가 없었다. 그러하기에 치유받은 사람을 파송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볼때 거라사는 유대인들의 주 거주지인 벳세다나 가버나움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배를 타고 예수의 주 사역지를 방문할 수도 있었고 쉽지는 않겠지만 걸어서도 갈릴리 바다 북쪽으로 가서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관계라는 것이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율법적 장애가 있는지라 (참고 사도행전 10장) 거라사인들이 예수의 사역에 대해 소문을 들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방문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이 돼지를 사육하는 이방인들의 마을에 들어가서 사역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가능하셨겠지만,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아마 마음이 매우 불편하였을 것이다. 


거라사는 역사적으로 알렉산더가 이스라엘과 시리아 지역을 점령한 주전 330년 이후에 세워진 데가볼리 지역에 속한 헬라 문명이 자리하고 있었던 도시였다. 거라사는 당시 히포스 혹은 아람어로 쑤시타로 불리는 데가볼리의 한 마을이었다. 지금도 쑤시타에 가면 헬라와 로마 시대 당시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훗날 비쟌틴 시대가 이스라엘에 뿌리를 내리면서 헬라와 로마 문명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쑤시타에는 지금도 교회터들이 남아 있다. 




사진 - 쑤시타 (히포스) 


거라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돼지를 사육하던 마을이었고, 헬라 문명이 찌들었던 곳이지만 훗날 이곳에 수도원이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단순히 비쟌틴 문명이 이스라엘에 들어왔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거라사의 광인이 예수로부터 치유 받은 사건 그리고 그가 전하였던 간증! 예수께서 자신을 치유했다는 간증은 분명 복음의 씨가 그 땅에 심겨지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가 훗날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석이 되었을 것이다. 


에수께서는 자신이 가지 못하는 땅에 거라사의 한 사람을 보냈다. 오늘날도 예수께서는 보내는 일을 하신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보내는 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할일이며, 거라사의 광인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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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버나움인가?

Biblical Site 2012.08.25 14:10 Posted by Israel

כי לא מועף לאשר מוצק לה כעת הראשון הקל ארצה זבלון וארצה נפתלי והאחרון  

הכביד דרך הים עבר הירדן גליל הגוים 


העם ההלכים בחשך ראו אור גדול ישבי בארץ צלמות אור נגה עליהם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아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 9: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샤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2-16)





왜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가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그곳에서 사역의 대부분을 보내셨을까? 위 구약과 신약 성서 구절들을 살펴보면, 마태는 과거 이사야 선지자가 전했던 미래의 메시야 사역이 예수를 통해 성취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즉 가버나움 사역은 이사야 선지자가 한 예언의 성취였다. 


이사야는, 훗날 메시야가 사역할 곳으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그리고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한다. 그런데 왜 하필 가버나움인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씀도 있었듯이, 나사렛에서는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눅4장). 


나사렛에서 약 10여킬로미터 떨어진 가나에서는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번째 기적도 행하셨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도 행하였다. 나사렛과 가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하였던 지명들에 속하였지만 이 두 마을은 예수의 사역지가 되지 못아였다. 




왜 가버나움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 시대 당시의 지리적 환경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가버나움은 당시 국제도로 (International Highway)가 통과하는 중요한 도시였다. 솔로몬이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 성을 건축하였는데 이 성들은 모두 국제도로가 통과하는 곳들이었다 (왕상 9:15). 이 국제도로가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해변길이며, 로마 시대에는 "비아 마리스"라 불렸다. 따라서 국제도로가 통과하는 곳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자연스럽게 국제도시로서 발전을 하게 되었고 국제 상인들이 오고가며 머무는 곳이었다. 


선교 전략적으로 볼때 가버나움은 교점 도시 역할을 하였고, 예수께서 전하는 복음이 열방 가운데 퍼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갖춘 도시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면 당시 도시내의 유대인들과 갈릴리 바다 주변 사람들만이 그 복음과 기적을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보고 듣고 가서 자신들이 들었던 복음을 자신의 고향에 혹은 다른 나라에 전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 가버나움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럼 가버나움은 큰 도시였는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약 2천명이 가버나움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나사렛에는 약 400명 정도가 살았으니 그에 비하면 큰 도시였으나 그 도시 규모 자체가 크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주민 외에도 전세계에서 몰려든 무역을 하는 이들이 늘 북적 북적 되었을테니 이보다 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좋은 곳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예수의 공생애 사역 기간중 예루살렘에 올라간 횟수는 몇번 되지 않는다. 해마다 있는 삼대 절기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다른 시기에 방문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횟수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거주민이 약 8만명 정도였다면 갈릴리 주변보다 훨씬 더 큰 도시였고 종교적 색체 역시 강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오히려 예루살렘 사역에 집중하지 않았다. 이는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예루살렘 종교인들의 반응이 시큰둥하였고 반발이 심하였기에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은 갈릴리에 비해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성서는 가버나움을 예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한 도시로 꼽는다 (마 11:20-24). 그리고 그들의 회개하지 않음을 책망한다.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중요한 기적들이 일어난 곳이 바로 가버나움이다. 그러나 결국 가버나움은 책망을 받고 말았다. 





예수 사역의 중심지였지만 정작 그 사역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회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첫번째로 하신 말씀이 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현대 교회는 예수 사역의 중심지이다. 늘 풍성한 말씀과 은혜스런 찬양이 넘쳐난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숨은 문제점들중 하나가 바로 "회개 없는" 교회라는 것이다. 예수의 첫마디는 "회개하라" 였다. 이 한마디는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가버나움에는 회개가 없었다. 현대 교회가 회개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아니 나 개인이 회개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분명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현대판 회개없는 가버나움! 이 고질적인 외식과 영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빨리 재를 뒤집어 쓰고 마음의 옷을 찢을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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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벽

Biblical Site 2012.06.13 00:43 Posted by Israel

높이 18미터, 길이 488미터의 벽, 골곡 깊은 유대 역사의 산 증인, 유대인에게 가장 거룩한 성지...코텔 하마아라비 (서쪽벽, 일명 통곡의 벽)... 


주전 37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른 에돔 족속의 후손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성전 확장 공사를 시작한다.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보잘것 없이 초라하였던 스룹바벨의 성전 (제 2차 성전)을 보며 과거의 영화로운 위대한 성전의 기억을 담고 있던 노인들은 그 기억을 눈물로 씻어내지 않았던가. 





수백년 동안 외세의 침입과 우상 숭배로 깊은 상처를 입었던 그 성전에 헤롯은 매쓰를 가한 것이다. 석공들과 당대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기술진 그리고 헤롯의 탁월한 건축술을 총동원하여 성전을 확장한다. 그러나, 성전 확장 공사는 그의 종교적 열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다만 유대 정통 혈통을 지니지 못했던 그이기에 유대인의 환심을 살 필요성이 있었다. 더 나아가 고대 시대의 다른 왕들처럼 자신의 업적을 후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건축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헤롯은 돌을 쪼개고 쌓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헤롯이 성전 확장 공사를 하는 중 가장 고난이도의 작업이 요구되었던 것은 지진으로부터 성전을 보호하는 것과, 산지 위쪽을 평탄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전 주변의 고르지 못한 산지의 계곡 사방에 돌을 쌓도록 명하였다. 돌을 쌓은 후에 굴곡진 빈 공간을 다시 돌을 쌓는 방법으로 헤롯은 성전산에 거대한 플라자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성전 주변 사방에 쌓여진 돌들은 벽이 되었다. 그 벽이 지금도 성전산에 남아 있다. 통곡의 벽 (서쪽벽) 역시 헤롯이 쌓아올린 것이다. 예루살렘 구도시 동쪽과 남쪽에서는 헤롯이 남긴 돌들의 유산을 분명하게 볼 수 있고 북쪽은 이미 집들이 들어서 있기에 성전산 플라자 벽을 보기가 용이하지 않다. 





다른 방향의 벽들과 달리 서쪽벽은 유대인들이 접근 가능한 곳이었다.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 그리고 초기 아랍 정권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해마다 이 서쪽벽을 찾았다. 그리고 그 벽에 서서 눈물의 기도를 하늘에 쌓아 올렸다. 훗날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후, 서쪽벽은 요르단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유대인들은 그 서쪽벽으로의 접근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시온산에 올라가서 서쪽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의 손에 서쪽벽이 넘어오기 전 요르단 정부는 서쪽벽 플라자를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의 수용소로 사용하였다. 


통곡의 벽은 헤롯이 쌓아올린 돌들의 유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통곡의 벽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늘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유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할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 중 하나가 "내가 이 성전을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은 무너졌으나, 그 성전을 지탱하던 통곡의 벽에 하나님의 임재가 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유대 전승에 따르면 성전산은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된 곳 아담이 살았던 곳이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곳이다. 하란 땅으로 도망하던 야곱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게다가 솔로몬과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졌던 곳이다. 


민족 전통의 유산이 숨쉬는 통곡의 벽이기에 유대인들에게 통곡의 벽은 그들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1967년 6일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특공대원들이 통곡의 벽에 기대서서 기도하는 장면은 얼마나 그들이 이 통곡의 벽을 사모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날 통곡의 벽에서는 바르 미쯔바 (계명의 아들, 유대 성인식)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 사진 출처: 사진작가 David Rubinger 

*** 이 사진으로 인해 루빈거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6일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통곡의 벽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고 아내와 함께 좋은 사진을 고를 때 이 사진보다는 랍비가 토라를 들고 학생들과 함께 통곡의 벽으로 들어오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반대로 그의 아내는 이 사진을 최고의 사진으로 꼽았다고 한다. 루빈거는 자신이 찍은 이 사진을 군 관계자에게 전달했고 이스라엘 군은 저작권를 고려하지 않고 이 사진을 인화하여 6일 전쟁사 책에 담았고 다른 사진사들은 이 사진을 마치 자신들이 찍은 것처럼 속여 팔기도 하였다. 훗날 루빈거는 저작권을 인정받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과거 유대인들은 헤롯을 미움을 뛰어넘어 증오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헤롯이 건축한 그 서쪽벽 (통곡의 벽)에서 민족 애환의 역사의 숨결을 기록하는 것을 보노라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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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산의 성전 건축

Biblical Site 2012.05.15 05:33 Posted by Israel

성전산 (Temple of Mount)에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매우 난해한 공사였다. 왜냐하면, 성전을 지을 터가 평지가 아닌 산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건축가는 산지를 깍는 평탄 작업을 해야 했는데, 이 작업은 오랜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대공사였다. 아마 성전을 건축하기 이전 성전산의 모습은 아래의 사진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런 산지위에 성전을 건축한 것이다. 





헤롯 당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 증축 공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였다. 이전 성전으 2배 정도로 성전을 확장하는데, 당시 헤롯은 성전 주변의 플라자를 크게 확장하였다. 확장 방법은 성전산 주변에 축대를 쌓고 나서 돌과 흙으로 축대 안쪽을 매꾸는 방식이었다. 오늘날 흔히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서쪽벽 역시 헤롯 당시에 건축된 것으로 성전의 플라자를 지탱하기 위한 용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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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신

Biblical Site 2012.01.11 13:08 Posted by Israel
        고라신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성서에서는 마태복음 (11 20-24)과 누가복음 (10장 13-15)에 언급이 되는데, 예수께서 그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을 책망하실 때 등장하는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말씀의 홍수속에 살아가지만, 귀를 즐겁게 하는 말씀 혹은 귀만을 즐겁게 하는 말씀만을 들음으로 인해 "회개"가 어색한 이 시대의 자화상이 바로 고라신입니다. 혹 예수께서 오셔서 회개의 말씀을 전한다 한들 회개 무감각증이라는 심각한 질병에 빠져버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귀만을 즐겁게 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과거 회개 무감각증에 빠져 있던 도시 고라신을 통해 보는듯 합니다.



        성서에 두번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예수의 사역 현장이 갈릴리 바다 북쪽이었고 가버나움과 벳세다와도 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틀림 없이 고라신은 예수께서 즐겨 찾으시던 도시들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역시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고라신을 자주 방문하셨다는 것을 귀뜸해 줍니다. 


         고라신은 4세기 경의 유대인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적지 입니다. 유대 마을은 회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는데, 고라신 역시 회당이 마을 중앙에 있고 회당 문은 예루살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로마 시대 당시의 국제도로 (비아 마리스)가 지나는 가버나움과 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고학적으로 예수 시대 당시의 유물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4세기경 지진에 의해 무너진 회당과 집터들이 남아 있습니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고라신은 밀알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 갈릴리 바다 북쪽 산 비탈은 물이 풍부하고 땅이 좋아 농부들이 보리나 밀 농사를 지어서 그렇게 불려졌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역시 예수께서 고라신이나 그 근방에서 말씀을 전하시면서 농부들의 씨 뿌리는 모습을 교보재로 사용하여 비유의 말씀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고라신에는 볼 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을 행하는 미크베, 회당, 그리고 올리브유를 짜는 틀과 연자 멧돌,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세의 자리 (모조품)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는 마태복음 23장 2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라는 말씀에 등장하는데, 회당내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가 되기도 하는 자리가 모세의 자리입니다. 행함이 없는 가르침이나 모델이 되지 못하는 가르침은 울리는 꾕과리보다 못한 것이지요. 어떤 이들은 "모세의 자리" 를 모세가 앉았던 자리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모세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훗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 모세의 율법을 회당내의 의자에 앉아서 가르쳤기에 모세의 자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회당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에 무너진 유적들을 유심히 잘 보면 돌 기둥에 새겨진 "메두사"가 보입니다.  왠 헬라 신화에 등장하는 신화적 존재가 회당내에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3-4세기 당시 유대 회당의 바닥에는 헬라 신화의 이야기가 많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본 불러그의 "왜 헬라 신화의 헬리오스가 유대 회당 마자이크에 장식되었는가? " 라는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고라신은 단순히 과거 책망받은 도시들중 하나로 훗날 지진에 의해 무너진 도시의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책망받기를 거부하거나, 거북해하는, 혹은 책망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오늘날의 무너진 교회의 모습과 우리 자신을 향한 소리없는 경고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첫번째 사진을 제외하고, 다른 사진들은 http://www.welcometohosanna.com/BIBLE_BOOT_CAMP/korazin.pdf 에서 받아 업로드 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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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브론 - 막벨라 굴의 의미

Biblical Site 2012.01.05 11:48 Posted by Israel
       헤브론은 성서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던 현장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작전중, 갈렙은 길갈에서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한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 14:12). 헤브론은 이스라엘 중앙 산악 지역중에서도 금싸라기 땅으로 유대 광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물이 풍부하고 좋은 땅이 있다. 헤롯왕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헤브론에서 물을 끌어 올 정도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때 그녀를 장사 지내기 위해 헷 사람 에브론으로부터 막벨라 굴을 구입한 곳이다.  

사진: 헤브론의 포도원 

       유대 광야 지역에는 곳곳에 굴들이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 굳이 막벨라 굴을 막대한 거금을 들여가면서까지 구입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에브론과의 협상을 통해 막벨라 굴을 은 사백세겔을 달아 주고 구입한다. 왜 그랬을까? 

       먼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장지는 단순히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묘지는 그 매장지가 속한 땅의 소유권이 매장지의 주인에게 있음을 증거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매장지는 매매가 가능하였지만, 권장되지는 않았으며, 매장지는 대를 이어서 사용하였고 중요한 유산 목록이었다. 
 
       아브리함의 막벨라 굴 구입은 언약의 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위에서 말한대로 매장지는 그 땅의 소유권이 매장지를 구입한 사람에게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약속을 주셨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가나안 땅 전부를 받지는 못했고 막벨라 굴만을 구입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막벨라 굴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정복하게 될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것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사진: 막벨라 굴이 있는 유대 회당 외부/ 회당 반대편에는 회교 사원이 있다. 

       성서의 토지법을 통해서도 막벨라 굴 구입 사건과 언약의 땅과의 관련성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성서의 토지법은 두 종류로 구분이 된다. "싸데 아후자" (a field of possession)과 "세데 미크네" ( a filed which has been purchased). 싸데 아후자는 희년이 되면 그 원주인에게로 돌려 주는 것이 법이었다. "희년 후에 년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 살 것이요 그도 그 열매를 얻을 년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년수가 많으면 너는 그 값을 많게 하고 년수가 적으면 너는 그 값을 적게 할찌니 곧 그가 그 열매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 (레 25:15-16). 싸데 아후자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 팔수는 (싸데 미크네) 있었다. 그러나 희년이 되면 그 소유권이 원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다만, 원 소유자는 년수에 따라서 그 땅을 샀던 사람에게 그 값을 치뤄야 했다. 싸데 미크네는, 원 소유자로부터 땅을 구입하여 희년이 될때까지 한시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권리만 있는 것이다. 

사진: 헤브론 시내 
      이제 아브라함이 에브론으로부터 땅을 구입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아후자트 케베르 (a burying place)"를 요청한다 (창 23:4)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소서" 아후자트 케베르를 요청한 것은 그 매장지의 소유권이 아브라함때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그 소유권이 보존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리함은 한시적으로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닌 영구적인 소유권을 위해 구입하고자 하였다. 

       창 23장의 아브라함과 에브론의 땅 구입 이야기를 보면, 마치 에브론이 막벨라 굴을 아브라함에게 공짜로 주는것처럼 보인다. 헷 족속은 친절하게, 아브라함이 매장지 구입을 요청하였을 때, 어느 곳이든지 아브라함이 원하는 곳에 죽은 자를 장사지내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의 소유자인 에브론에게 그 굴을 팔라고 한다. 에브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1절). 얼핏 보면, 에브론이 공짜로 밭과 막벨라 굴을 아브라함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에브론이 완곡한 표현으로 아브라함에게 밭과 막벨라 굴을 팔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한시적으로 밭과 막벨라 굴을 사라의 매장지로 주겠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세대가 지나면 그 소유권이 에브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이 막벨라 굴을 열조의 매장지로 삼기 위해서는 또 다시 거래를 해야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거래를 시도한다. 그러자 에브론은 땅 값으로 은 사백 세겔을 말하고 아브라함은 그 값을 치루고 밭과 막벨라  굴을 구입한다. 다시 말해 에브론으로부터 땅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수받은 것이다. 

      성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에브론으로부터 구입한 막벨라 굴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 "라 아후자트 케베르" (a possession of a burying-place)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20절) 이는 훗날, 아브라함의 시대가 지나더라도 그 소유권이 헷 족속이 아닌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법적 소유권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진: 헤브론으로 들어가는 입구 
 
       헷 족속과 에브론, 그리고 아브라함 시대에는 희년 제도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에서는 땅을 매매한 경유 그 땅을 산 사람에게 그 소유권이 영구적으로 넘어갔다. 예를 들어 창 33장 18절 이하에서 야곱은 세겜 족속으로부터 은 일백개를 주고 땅을 구입하였다. 훗날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죽기 직전 요셉에게 자신이 세겜 족속으로부터 구입한 땅의 법적 소유권을 준다. 야곱과 그의 가족은 가나안을 떠났고,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 것은 400년 뒤였지만 야곱이 샀던 땅의 법적 소유권은, 적어도 문서적으로는 야곱 가족, 그 중에서도 그 땅을 유산으로 받은 요셉에게 있었다. 이는 당시 가나안의 토지 거래는 성서의 토지 거래법이 희년 제도라는 것을 통해 영구적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과는 달리 매매를 통해 영구적인 소유권이 이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 구입은 그 소유권이 헷 족속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로 영구적으로 넘어간다는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막벨라 굴은 사라와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레아, 그리고 야곱이 장사된 곳이다 (창 49:31). 요셉은 유언으로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 땅으로 가져다가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그는 막벨라 굴이 아닌 세겜 땅에 장사되었다 (수 24:32). 왜 막벨라 굴이 아닌 세겜땅인가? 창 48:22를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칼과 활로 빼앗은 땅을 유산으로 주는 장면이 나온다. 본 글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창 33:18절 이하에 보면 야곱은 세겜 땅에 거주하면서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 은 일백 개를 주고 땅을 구입하고 단을 쌓은 후 그 땅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 (33:20). 여호수아 24:32 에서도 야곱이 세겜 땅을 구입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한편 창 34장의 디나 사건에 보면 세겜 땅을 시므온과 레위, 그 뒤를 따라 야곱의 아들들이 공격을 하여 세겜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들을 강탈하는 사건이 나오고 야곱은 그들의 약탈을 꾸짖는다. 야곱이 직접적으로 칼과 활로 그 땅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물론 세겜 사람들은 히위 족속이고 야곱이 요셉에게 말한 사람들은 아모리 사람들이지만, 창 15:16에 의하면 아모리 사람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대표하는 명칭이었으므로 야곱이 말한 아모리 사람들은 히위 족속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요셉이 막벨라 굴이 아닌 세겜 땅에 장사된 이유는 간단하다. 세겜 땅은 야곱이 요셉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세겜은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도시이다. 따라서 요셉이 세겜 땅에 장사된 것은 여호수아 24:32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땅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요셉은 세겜 땅에 장사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묘지는 죽은 이를 매장하는 장소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개인 혹은 지파가 영구적으로 소유하는 땅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고, 동일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구입한 것 역시 언약의 땅의 상속이 그의 후손들에게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ldan Keynan (Bar Ilan University), "Jewish Bruials" October, 2010
Ze'ev Safari (Bar ilan University), "Abraham's dealings with the Sons of Heth," Parashat Hayye Sarah. 
JPS Torah Commentary, Genesis 48:22 

* 토지 희년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보기 위해서는 레위기 25장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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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벽 왼쪽의 고고학 발굴

Biblical Site 2011.12.29 04:53 Posted by Israel

      예루살렘 구도시내, 유대인 지역과 무슬림 지역의 경계가 된 서쪽벽 (일명 통곡의 벽) 은 남자와 여자가 들어가는 입구가 구분되어 있다. 여자들은 서쪽벽 왼편에 위치해 있는데, 그 여자들이 기도하는 장소 왼쪽으로 지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고고학 발굴을 하던 장소가 보인다. 한때는 이 발굴 현장을 놓고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충돌이 있기도 했는데, 무슬림들은 이 발굴이 이슬람 사원인 알악사 사원과 가깝기 때문에 발굴을 통해 사원을 위험하게 한다는 이유로 발굴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 발굴 장소 아래쪽으로는 오펠 가든이 있다. 예루살렘 성문들 중 분문을 빠져 나가면 다윗성 (the city of David)이 있는데, 이 다윗성은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시온성을 빼앗은 이후에 자신의 도시를 만든 현장이다. 다윗 당시의 도시 규모는 대략 성내 거주민이 2,000명 정도가 거주할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다. 이후, 솔로몬 시대로 넘어가면서 도시 확장 공사를 하여 현재의 성전산쪽을 개발하였고 성전산에 1차 성전을 건축하였다. 성전 공사의 현장이었던 성전산은 평평한 곳이 아니었기에 평탄 작업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헤롯이 성전 확장 공사를 하면서 2차 성전을 두배 정도로 확장할때 그가 한 일중 하나가 바로 성전 주변에 플라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즉 높고 낮은 산을 깍고 돌을 까는 평탄 작업을 하였는데, 이때 바로 서쪽벽(통곡의 벽)은 성전과 평탄 작업을 한 플라자를 지탱하는 웅벽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사진: 오펠 가든 안쪽의 2차 성전 시대 당시의 도시 도로. 사진 안쪽이 바로 발굴 현장이다. 

        다시 발굴 이야기로 돌아가서
, 이 발굴 현장은 여러 시대의 모습을 볼수 있는데, 첫번째는 주전 8세기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현장이다. 아마 히스기야 이전에는 이 서쪽벽과 연결되는 이 발굴 현장은 도시의 성 외곽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현재의 서쪽벽은 헤롯 당시의 것이지, 1차 성전 시대의 것이 아니다!) 그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한 주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거 남유다로 이주해 오면서 예루살렘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당시 국제 정세가 불안하고 앗수르는 호시탐탐 남유다를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결국 앗수르가 남유다를 침공하려할 즈음에 히스기야는 급히 도시 확장 공사를 감행하여 현재의 시온산 주변과 유대인 지역중 확장된 성벽이 있는 곳까지 성벽을 쌓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쪽벽은 도시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확장된 성벽 (the Broad Wall)은 성서 고고학적으로 1차 성전 시대 당시의 예루살렘 크기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던 최소주의자와 최대주의자 사이의 결전에 최대주의자의 손을 들어준 고고학 발굴이기도 하다.

사진: 가브리엘 발카이 교수

        가브리엘 발카이 교수 (히브리대 로스버그 대학원)가 수업중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흐만 아비가도는 케서린 케더린 (영국 여 고고학자, 여리고와 예루살렘을 발굴함)과 함께 예루살렘의 크기에 대해 최소주의자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학자들이었는데, 1967 6일 전쟁 이후 구도시내 유대인 지역의 발굴을 진행하다가, 아비가도는 히스기야 시대 당시에 건축한 확장된 성벽을 발굴하게 되었다. 이 성벽은 자신이 주장하던 1차 성전 시대 당시 예루살렘의 크기는 다윗 성과 성전산 주변뿐이라는 것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학자의 양심에 따라 죽기 전에 최소주의가 잘못되었으며 1차 성전 시대 당시에 예루살렘의 크기는 시온산 주변까지도 확장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케서린 케더린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사진: 유대인 지역내의 The Broad Wall

         또 다시 발굴 이야기로 돌아가서
, 이 발굴 현장은 8세기 이후 주로 상류층이 거주하던 현장이었고, 훗날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할때까지 사이에 남아 있던 유물들 중에는 인장들과 사람과 동물 형상의 장식물 혹은 주술적 행위를 위한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바벨론 침공, 그리고 포로기 이후에는 아마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훗날 하스모니안 (주전 167-37) 시대와 헤롯 왕가 시대 (주넌 37주후 70) 사이에 이 주변에는 미크베 (제의적 의식을 위한 정결 의식탕)들이 있었다. 현재도 오펠 가든을 통해 이 발굴 현장 주변을 들어가 보면, 미크베들이 남아 있다.

         상류층이 거주하였던 이 발굴 현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형적인 집 구조인 4방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조사에 의하면 위에서 큰 돌들이 떨어져서 한번에 집들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돌들이 떨어진 것이 바벨론의 침공때문인지 아니면 지진에 의한 결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펠 가든 안쪽으로 들어가면, 실제로 예수 시대 당시의 도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도로 바닥은 주후 70년 성전 파괴 당시 위에서 떨어진 큰 돌들에 의해 도로가 움푹 들어간 자국들도 있고 돌들이 쌓여 있기도 하다. 벽 맞은편에는 당시 상점들의 아치형 틀들도 볼 수 있다.  성지를 돌아보는 것은 일종의 시간 여행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장소들속에서 우리는 역사가 남긴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비록 그것이 무너진 돌무더기일지라도, 그 돌들의 소리지름을 들을 수 있는 복된 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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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시험산 수도원

Biblical Site 2011.08.28 14:16 Posted by Israel
귀챦이즘과 바쁨병은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가 봅니다. 이제는 기억조차도 가물 가물한 아내와의 여리고 방문기를 적어보려고 컴퓨터안에서 먼지 쌓인 디지털 사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사진속에 먼지들을 불어내는 순간, 그때의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릅니다. 

여리고는 성서속의 사건들중에서 매우 중요한 몇가지 사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리고는 민수기 22장 1절을 시작으로 57번 구약에 등장합니다. 신약에서는, 7번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성서 사건이라면 여리고 정복과, 눅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그리고 삭게오 사건등입니다. 다른 사건들도 중요하겠죠. 여리고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야레아크" 아랍어의 "아리하"로 달(Moon)과 관련이 있어 혹, 가나안 시대 당시에 이 동네 사람들은 달을 신으로 섬겼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진: 유대 광야에 있는  시험산 수도원에서 바라본 여리고 전경입니다. 

왕하 2장 19절 이하에서는 엘리사가 이 동네 사람들을 위해 물을 고쳐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리고 사람들 왈..."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모샤브 하이르 토브) "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을까요? 짧게 말하면, 여리고는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 아닙니다. 연중 200 미리 정도 내리면 많이 내리는 것이니까요. 대신 해수면 보다 약 250 미터 낮은 곳에 있다보니, 해발 750 고지의 예루살렘과 그 근방에 비가 내리면, 정작 비의 해택을 보는 동네는 여리고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샤브 하이르 토브" 라는 말을 할만도 하죠...  

이제부터는 여리고 중에서도 시험산 수도원 간결 방문기입니다. 한 여름에 여리고는 기온이 평균 40도 정도 됩니다. 체감 기온은 약 45-6도 정도로 올라가기도 하죠. 그런 와중에 아내와 함께 여리고에 있는 시험한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성지 순례팀이 오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옵니다만 지갑이 워낙 가벼운지라, 아내를 은근 슬쩍 협박(???)해서 수도원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약 15분 정도면 넉근히 올라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다행히도 아내가 케이블 카의 유혹을 받지 않고 함께 걸어 올라가 주었습니다. 중간에 업어  달라면 아마 포기했을 것입니다. 

 
수도원 올라갈때 이용당하는 (??) 케이블카  

수도원 정상에 도착하기전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레스토랑과 커피숍이 있습니다. 시험산을 올라가면서 냉커피의 유혹도 있고 케이블카의 유혹도 있지만, 사람이 커피와 케이블카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오른쪽 눈을 감고 올라갔습니다. 수도원 입구에서 문을 두드리면, 문지기 아저씨가 나옵니다. 친절하게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는 아저씨에 잊어서는 안될 한가지...나오면서 팁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통수가 매우 따갑죠... 

수도원 안쪽에는 동굴이 있습니다. 일명 예수께서 금식하셨다는 동굴입니다. 그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시험산에 올라왔으니 그 동굴에 들어가서 기도는 해야 합니다. 늘 인생이 당하기 쉬운 시험들이죠. 떡, 권세, 명예, 그리고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교만등을 내려놓는 기도를 드리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수도원에서 내려다 보는 여리고는 정말로 환상적입니다. 수도원 반대편 절벽 곳곳에는 동굴들이 있습니다. 한참 수도원 영성 운동이 발전했을 당시에는 약 140개가 넘는 수도원들이 유대 광야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시험산 수도원이고요. 그 동굴들속에서 기도하던 수도사들의 영성을 얻고 내려가고 싶지만, 그들의 깊이 있는 영성을 얻기에는 제 생각 주머니가 너무나 큰듯 합니다. 어디 구멍난 곳 없나 믿음의 주머니도 한번 점검해 보고요....그렇게 수도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아마 예수께서도 40일 금식을 마치시고, 십자가를 향한 그 험난한 길을 걸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땀과 눈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순종의 음성을 들었던 유대 광야의 돌들을 제 가슴에 안고 내려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원해 봅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단 15분이면 충분....
 
 
살려줘 라고 말하는 것인지...아니면 다 올라왔다고 좋아서 손 들고 있는 것인지...
 

수도원내에 있는 동굴에서 기도하는 아내입니다. 
 

수도원의 십자가입니다. 


 수도원 건너편으로 기도 동굴들이 보입니다. 
 

이곳 수도원은 그리스 정교회 소속입니다. 숙소는 있는 것 같은데, 잠을 잘 수는 없다고 하네요..어떻게 이런 절벽에 수도원을 세웠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이 일은 요한의 침례(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요 1:28).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침례 받으신 곳이 어디일까요? 갈릴리 바다 남쪽에 위치한 "야르데니트" 라는 곳일까요? 아니면 벳세다 근처 상부 요단강쪽일까요? 아니면 여리고에서 가까운 요단강일까요?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보면, 정확한 장소를 찾기는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요단강 침례터로 가는 길 안내문입니다. 90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알렌비 국경 전에 있습니다. 길을 벗어나서 군사 기지를 양 옆으로 끼고 약 5분 정도 들어가면 됩니다. (물론 뚜벅이가 아니라 차를 타고죠). 

         "요단강 건너편" 이란 말은 도대체 어디를 말할까요? 요단 동편, 즉 요르단 쪽일까요? 아니면 요단 서쪽, 이스라엘쪽일까요?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지겠죠. 하퍼콜린스 성서 사전과 에르드만스 성서 사전에는 "요단강 건너편"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수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세기경 모자이크 지도인 마다바 지도에는 요단 서쪽 (이스라엘쪽)을 "요단강 건너편"으로 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다바에는 "베다니"가 아닌 "베이트 아라바 (House of Crossing)"로 명하였고, 이 명칭은 탈무드에도 기록되어 있고 오리겐, 유세비우스의 책 Onomastion에도, 그리고 제롬의 Liber Locorum (4세기말경)에도 베이트 아라바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고대 사본들은 어떨까요? 바티카누스와 시나티쿠스 (4-5세기경 사본)는 베다니로 기록하였고, 시리아 역본은 베이트 아라바로 기록하였습니다. 



         마다바 지도와는 별개로, 옛 순례자들은 요단강 건너편을, 요단 동편으로 이해한듯 합니다.4세기초 요단강을 순례하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이 헬레나는 요단강을 건너 침례 요한이 살았다는 동굴을 방문하였고, 훗날 유세비우스는 헬레나가 그 자리에 교회를 건축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530년경 테오도시우스 역시 요단 동편을 순례한후 그 자리에 교회가 있고 예수께서 침례받은 현장에 철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한편,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시켰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건너온 것처럼, 예수께서도 요단강을 건너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믿었고 여호수아가 건넌 바로 그곳에서 예수께서 침례를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구약 이야기로,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을 건너 엘리야가 승천한 장소 역시 예수께서 침례를 받은 장소 근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요단 동편에는 엘리야의 언덕 (Tell Mar Elias)라는 곳이 있습니다. 

        고고학 이야기를 잠시 짧게 하자면, 1899년에 페더르린 신부가 요단 동편 베다니를 발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굴 현장에서 여러개의 교회터들을 발견합니다. 이 밖에도 1996년부터 2002년 사이에 요르단 고고학자인 무하마드 와헤브가 "텔 엘 카라르"를 발굴하였는데 이곳에서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로마 시대의 흔적들과 더불어서 헬라 시대, 초기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 초기 아랍 시대, 그리고 오토만 시대의 동전, 비문, 토기들을 다량 발굴하기도 하였습니다. 


침례터입니다. 바로 건너편이 요르단쪽이고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설명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쪽에 있는 요단강 침례터가 문을 열었다고 해서 아내와 함께 갔는데, 마침 대형 버스에서 유대인들이 내리더군요. 침례터 하면 신약하고만 관련있을 것 같지만 이미 언급한대로, 요단강 자체는 구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죠. 유대인들과 함께 침례터 근처에 가서 가이드의 설명을 공짜로 들었습니다. 흙탕물에다 폭도 좁고 건너편 요르단쪽 침례터에 와 있는 사람들도 보이고, 마음 같아서는 펄쩍 뛰어서 건너가고 싶기도 하지만 꾹 참고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요르단쪽에 있는 침례 요한 교회입니다 (그리스 정교회 소속) 

        이야기의 대부분은 구약에 나오는 요단강과 관련된 사건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폭이 좁은 요단강을 보며 "나하르 아나크" (거대한 강) 이라고 연신 말하더군요. 나중에 왜 거대한 강이라고 했냐? 나일 강이나, 중국의 황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성서의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기에 거대한 강이라고 합니다. 유대인 가이드는 설명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침례 요한의 외침을 말한 후에 창22 장에 나오는 아케다 사건과 연결시키더군요. 그러나, 아쉽게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야되심까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 침례터를 방문해서 예수님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그중에, 누군가는 이렇게 묻겠죠? "누가 메시야이냐?" 과거 침례 요한에게 나아왔던 유대인들이 그를 향해서 물었던 것처럼 말이죠...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바로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은 분 예슈아가 바로 메시야이다... 


옛날 교회이겠죠...


물은 흙탕물인지라 더러워보이지만, 2010년 7월 28일자 Ynet 인터넷 뉴스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수질 검사를 해보니, 오염이 전혀 되지 않은 물로 침례를 받아도 된다고 하네요. 이번 여름에 아들과 딸에게 침례를 줄 생각인데, 이곳에서 침례를 주어도 될듯 합니다. 


본글의 일부 내용과 사진들은  "Where Jhon Baptized - Bethany beyond the Jordan," By Rami Khour BAR 31:01, Jan/Feb 2005 에서 발췌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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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의 낮과 밤 전경

Biblical Site 2010.05.28 23:55 Posted by Israel

블러그를 다시 옮겼습니다. 최근까지 사용하던 블러그가 다른 사이트와 통합되는통에 이사를 하게 되었네요. 이 블러그를 옮기고 자료 정리를 해준 김진성 형제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리고 전경입니다. 여리고는 여러가지로 유명하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그리고 신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 예를 들면,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정복 이야기, 엘리야 & 엘리사 이야기, 신약의 삭게오 이야기등에 등장합니다. 도시 뒤편으로 보이는 산은 유대 광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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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Capernaum)

Biblical Site 2010.04.28 17:32 Posted by Israel
가버나움(히브리어 - 크파르 나훔)은 엔 쉐바 (헵타곤 - 오병이어 기념교회와 베드로 수위권 교회)로 부터 약 5 Km 정도 떨어진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구약성서에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신약성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입니다. 문헌상으로는 신약성서, 요세푸스 그리고 탈무드 문학등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사진: 가버나움 회당 내부입니다.


사진: 가버나움 회당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가버나움은 사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였으며, 마 9:1에서는 가버나움을 "본 동네(own city)"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도시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셨으며,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12 제자들중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그리고 마태 (마 4;13-22, 8;5-22, 9:1-34, 막 1:21-34, 2;1-17, 눅 7:1-10)등을 선택하셨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많은 시간을 베드로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근처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눅 7:5).


사진: 가버나움 교회와 집터입니다.

1차 유대 봉기 당시, 요세푸스가 로마에 투항하기 전, 요단강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가버나움으로 후송되었으며 헵타곤의 샘물을 가버나움의 샘물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전쟁사 3권, 520).

에피파네아스에 의하면, 4세기 까지 가버나움은 유대인들이 주 거주민이었으며, 이방인들, 사마리아인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도시에 거주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미드라쉬에 의하면, 이미 2세기때부터 유대-기독교인들이 가버나움에 거주하였으며, 3세기 말경의 랍비인 ISSI는 가버나움의 거주민들을 저주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 도시에 주로 거주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비잔틴 제국 시대 당시에도 가버나움에는 유대인들이 계속 거주하였다는 증거를 하맛트 가데르 (갈릴리 남동쪽 아래에 있는 곳)에 있는 6세기 당시의 회당 모자이크에 새겨진 아람어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진: 연자 맷돌과 올리브 프레스입니다. 연자 맷돌을 볼때마다, 한 소자를 실족시키느니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가버나움 유적지의 특징중 하나는, 회당과 교회의 공존입니다. 위 사진으로 보는 회당은 약 4세기 말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교회는 (흔히 베드로의 생가위에 옥타곤 형식으로 건축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보다 약간 늦은 5세기 중엽에 건축되었습니다. 매우 근거리에 두 건물이 위치하기 때문에, 가버나움의 유대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 그리고 이방의 신자들 (아마 주로 성지 순례자들)의 공존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특히 4세기경의 순례자였던, Egeria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집이 교회로 바뀌게 되었다. 아직도 베드로 사도의 집의 울타리가 남아있다."

사진: 법궤가 실린 수례입니다. 원래 법궤는 레위인들이 매고 다니도록 되어 있죠. 웃사 사건이 연상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중 가장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둠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3).

참고 문헌: 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I, (29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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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Beatitudes

Biblical Site 2010.04.27 20:09 Posted by Israel
사진: 갈릴리 바다 북쪽 산마루에 자리하고 있는 팔복교회입니다. 전통적으로 예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강론하신 곳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복 있는 자" 라는 표현은 구약에 45번 신약에 50번 등장합니다. 채 100번이 되지 않는 빈도수이죠.

첫번째로 "복 있는 자"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성서는 신명기서 33:29절로,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전했던 최후의 연설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그러나,  "복 있는 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성서 구절이 시편 1편일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목상하는도다" (시 1:1-2)

신약 성서에서도 "복 있는 자"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이 그 대표적인 성서 구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도 "복 있는 자"가 등장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 분을 알아가는 자야 말로 진정한 "복 있는 자"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복 있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혹 이미 복 있는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복 있는 자"가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진: 팔복교회 내부입니다. 천장에는 라틴어로된 "팔복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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