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αγαπας)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φιλω)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αγαπας)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φιλω)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φιλεις)하느냐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φλιεις)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


'아가페'와 '필레오'를 구분하여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 (divine love), 필레오는 친구 혹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으로 해석 및 설교를 하는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한 것은 신적인 사랑이었으나 베드로는 신적인 사랑의 수준으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친구간의 사랑 수준으로 예수를 사랑하였고, 결국 예수께서도 베드로에게 필레오의 사랑으로 물으셨다... 




사진: 베드로 재사명 교회 (베드로 수위권 교회) 사랑 모양의 돌판 


그렇다면 요한은 이 장면을 기록할 때 과연 그는 아가페와 필레오의 뜻을 구분하여 본문을 기록하였을까? 


신약 성서 시대 당시 유대인들은 적어도 세가지 언어권속에서 생활하였다. 당시에는 아람어가 오늘날의 국제어인 영어와 같은 지배적인 언어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모국어였고 종교적인 언어로 회당이나 성서 읽기에 사용되었지만 생활속에서는 아람어가 주 언어였다. 또한 헬라어 역시 아람어와 함께 국제 언어로 사용되었다. F. F 부르스에 의하면, 예수의 성육신이 로마 제국시대 당시에 있었던 중요한 몇가지 이유들중 발달된 국제 도로와 공용어인 헬라어는 훗날 효과적인 복음 전파에 중요한 물리적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아람어는 주전 8세기 경에도 국제 언어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앗수르의 산헤립이 남유다를 공격하였을 때 산헤립이 보낸 랍사게가 유다 말 즉 히브리어로 항복을 요구하였을 때,  예루살렘의 정치인들은 랍사게에게 유다 말이 아닌 아람어로 말해줄 것을 요청한다.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하건데 아람 말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왕하 18:26). 


적어도 유다의 지식인들은 아람어를 할 줄 알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사실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같은 셈족어로 아주 비슷하여 배우기가 쉽다. 다시 돌아가서 신약 성서 시대의 유다인들은 아람어를 구사하였고 에수와 그의 제자들 역시 아람어로 대화를 하였다. 따라서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와 베드로 사이의 대화의 일차적 언어는 아람어였을 것이다. 훗날 요한은 이 아람어로 한 대화를 성서를 기록할 때 헬라어로 바꾸어서 기록을 하였다.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다. 아가페. 필레오. 스테레고. 에로스.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 필레오와 스테레고는 친구 혹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그리고 에로스는 남녀간의 사랑으로 정의하지만 실제로는 각 단어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한편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하바"이다. 아하바에는 신적. 친구간 혹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 모두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단어가 사용된 컨텍스트가 그 단어의 의미를 규정한다. 


예수께서는 아람어 (혹은 히브리어)로 베드로에게 '아하바 (동사형 아하브)'하는지를 물었을 것이고, 베드로는 동일한 단어인 '아하바'로 답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차적인 언어로 볼때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답변에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신적 사랑'을 말하는지 '친구간의 사랑'을 말하는지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 단어가 사용된 상황 역시 단어의 내적 의미를 쪼개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헬라어로 성서를 기록할 때 아가페와 필레오 이 두 단어를 사용하였다. 왜 요한은 '아하바'를 두 단어의 헬라어로 사용하였을까? 과연 요한이 이 두 단어를 사용할 때 그는 두 단어가 주는 내적인 의미 혹은 그 단어가 공유하는 혹은 분명히 구분된 의미를 예수와 베드로 사이의 대화에 적용하기 위해 이 두 단어를 선택적으로 사용한 것일까? 




사진: 베드로 재사명 교회 (베드로 수위권 교회.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가)


요한의 저작인 요한 복음과 그의 서신서에 등장하는 '아가페'와 '필레오'의 상황적 의미를 살펴보면 요한이 정의한 그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가페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은 요 3:16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신적인 사랑이 그대로 '아가페'에 들어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19절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에서도 '아가페'가 사용되었다. 12:43에도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일 2:15 에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에서도 '아가페'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아가페가 사용된 상황을 보면 신의 사람을 향한 사랑 혹은 사람의 신을 향한 사랑뿐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악을 사랑하는 사람, 즉 전혀 신적이거나 거룩하지 않은, 신성하지 않은 오히려 인간의 죄악 냄새가 풀풀나는 죄를 원하는 원초적 본능을 말할때에도 아가페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뿐 아니라 바울도 말하기를 그의 동역자였던 데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을 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아가페)하여'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필레오는 어떨까? 


요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여기에서 사용된 것은 아가페가 아닌 필레오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사이의 사랑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으로 정의한 필레오의 사랑으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요 11:3에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필레오의 사랑을 한 것을 볼 수 있으며, 16:27에서는 제자들의 예수를 향한 사랑을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한다. 요한은 계시록 3:19에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라는 주의 말씀에서도 '필레오'를 사용한다. 바울 역시 필레오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을 표현할때 사용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필레오)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 16:22). 




사진: Feed my sheep! 베드로에게 재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베드로 재사명 교회)


이로 보건데, 아가페와 필레오는 그 단어들 사이의 분명한 구분선이 없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필레오의 사랑으로 답을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사랑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가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없기에 예수께서 어쩔 수 없이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최고의 수준에서 한 단계 내려와서 그렇다면 너는 나를 필레오 수준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라고 물은 것도 아니다. 아가페와 필레오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필레오 사랑 고백 때마다 하신 말씀에 주목하는것을 놓칠 수 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일관되게 필레오의 사랑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양을 먹이고 (to feed) 양을 치라는 (to shepherd) 사명을 주신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 21장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첫 부르심과 사명 주심 이후에 다시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에게 재사명을 주는 것. 즉 아가페이냐 혹은 필레오냐의 문제가 아닌 어부의 길로 다시 돌아가 베드로를 찾아가 그에게 재사명 (양을 먹이고 양을 치는)을 주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미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