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모든것이 완벽해 보였다. 선조들이 잃었던 땅을 되찾았을뿐 아니라 그렇게 괴롭히던 이방 나라 아람의 수도 다메섹을 공격하여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 (참고. 왕하 14:23-29).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 북 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 이후 최고의 경제 부흥기를 누리고 있었다. 주변 국가들도 감히 넘볼수 없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나라는 안정되었고 지중해 해상 무역을 장악한 페니키아와의 교역을 통해 고급 수입품들을 들여올 정도로 삶의 여유가 있었다. 백성들은 이스르엘 평야의 풍성한 수확으로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것 이상으로 풍족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백성들 앞에서 모세는 미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를 미리 내다 보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32:15).  약속의 땅에서 모세의 후손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풍요가 가져올 결과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아닌, 배교였고 타락이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조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약속의 땅에 정착하였고 뿌리를 내렸다. 주전 8세기 풍요속에 모세의 노래는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 버렸다. 살이 쩠다. 비대해졌다. 윤택해졌다. 무릎을 꿇지 못할 만큼 배가 나와 버렸다. 그리고 풍요의 원천인 하나님을 버렸다.



사진: 성서 시대의 금 장신구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선지자 아모스의 메세지는 심판에서 출발하지만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열심으로 끝을 맺는다. “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9:11-15).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채찍을 들면서도 이 소망의 메세지를 그들 가슴에 새겨주고 싶었다. 그 심판후의 소망의 전달자로 아모스를 부르셨다.


선지자 아모스. 그는 예루살렘에서 약 16 킬로미터 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진 유대 광야 산지의 작은 마을 드고아 출신이다. 7:14에 의하면 아모스는 선지자도, 선지자의 아들도 아닌 양떼를 치는 목자이자 돌무화과 나무(뽕나무)를 재배하는 농부였다. 선지자 전성시대였던 주전 8세기에 하나님은 지극히 평범한 목자이며 농부인 아모스에게 선지자의 소명을 주셨고 북 이스라엘의 종교 성지인 벧엘로 보내셨다. 그 땅에서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풍요속에 가려진 치부인 부정. 부패. 불의. 부정직. 도덕적 타락의 죄들을 드러냈다.


스스로 선지자도, 선지자의 아들도 아님을 고백한  아모스였지만, 그는 사자(Lion)의 심정으로 북 이스라엘 백성앞에 섰다. 아모스는 그 백성을 향해 부르짖으시는 하나님을 전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1:2). “부르짖다라는 히브리어는 샤아그로 사자의 부르짖음을 상상할 수 있는 동사이다. 아모스는 사자의 부르짖음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 고통. 심판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로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심판의 열심을 전한다. 1장에서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을 이웃하는 나라들의 죄를 지적하는데, 이들 국가의 죄는 전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2장부터 아모스가 들춰내는 북 이스라엘의 죄는 전쟁이 아닌 사회 생활속에서 저지르는 범죄였다.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2:6-7).



사진: 양각 나팔


이 백성은 종교적 열심이 있었다.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4:4). 벧엘 제단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경배와 제사를 드렸지만, 정작 삶속의 공의와 정의, 정직과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긍휼과 공의의 열매가 있는 예배가 없었다. 이들이 회복해야 할것은 제단에 드리는 번제나 소제가 아닌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삶의 예배였다 ( 5:22-4).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껏해야 20~30여년 정도 지나면 무너질 영광에 불과한 나라였.정의와 공의가 메마른 백성들, 배교한 나라를 향한 멸망은 이미 결정되었다. 다만 풍요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고 멸망을 향한 시계 바늘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풍요와 소망에 대한 말씀에는 귀를 기울였지만, 죄악으로 병든 몸과 영혼을 치료하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된다는 경고와 심판의 메세지를 듣지 않는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멸망뿐이었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 9:8).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시키고 죽이기 위한 심판이 아니다. 언제나 늘 하나님의 심판은 돌이킴을 위한 도구였다. 그러하기에 선지자는 사자의 부르짖음으로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는 하나님과 긍휼로 그 심판으로 찢겨진 백성들을 싸매고 돌이키실 하나님. 회복의 하나님을 전한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네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9:15).


*** 이 글은 "새가정" 4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