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구원)는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의 죄악과 공의와 정의가 바닥을 치던 주전 8세기경(주전 753-722) 선지 활동을 하였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30여년 사이에 왕이 일곱번이나 바뀔 정도로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했고 바알 숭배가 만연하였다. 기나긴 타락의 암흑 시대 가운데 호세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호세아 1장을 읽는 독자는 그 어떤 드라마틱한 선지 소명 이야기를 접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전한 첫 말씀은 순종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이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때에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1:2).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침묵함으로 순종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벌거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녔다 ( 20:3). 하나님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에스겔의 아내의 생명을 취하셨다 ( 24:18).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한다. 그리고 두 아들 (이스르엘, 로암미)과 딸 (로루하마)을 낳았다. 이스르엘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피할 수 없는 패망을( 1:4). 딸 로루하마를 낳았을 때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지 않을 것을( 1:6).  로암미를 낳았을 때 이들은 더 이상 그의 백성이 아님을 선언하셨다 ( 1:9).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후회라도 하신것일까? 하나님은 곧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그러나라는 반전의 접속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전한다. “그러나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너희 형제에게는 암미 (나의 백성)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 (은혜를 입은 자)라 하라” ( 1:10-2:1).

        호세아가 피를 토하듯 타락한 백성들에게 돌이킴을 외친다 하더라도 기경되지 않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시대로 내몰아 가고 싶었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물이 있는 북이스라엘이 아닌 거친 모래 바람의 들판, 뜨거운 태양, 메마른 가시나무만이 서있는 그 광야로 그들을 이끌고 싶었다. 과거 그 광야에서 백성들은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엎드렸다. 물이 부족할 때 그들은 바알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살았다. 범죄하였으나 돌아왔다. 그 과거의 광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의 사랑받는 신부로 맞이하고 싶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19).



 사진: 네게브 (남방) 광야의 싯딤 나무 


        그러나, 백성은 광야 생활을 잊었고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없었다( 4:6).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이 찢겨져 상했음을, 치명적인 영혼의 병이 들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를 찾아야 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야만 했다. 오직 여호와만이 그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메어 주실 것임이라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1-2). 슬프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무성한 포도나무가 있었고 풍부한 곡식과 주상들을 아름답게 꾸밀 여유도 있었다 ( 10:1). 이스르엘 평야에 씨를 뿌릴 시기에 비가 내리면 그들은 바알의 축복으로 여겼다. 땅은 기경되었고 씨앗은 심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말한다.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묶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 10:12). 그들이 기경해야 할 것은 땅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버렸고 음란한 부인이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가듯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에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지자는 이렇게 전한다.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11:8-9). 사람은 사람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인생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결코 타락한 인생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선지자가 써내려가던 글의 마침표를 찍을 때 이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손에 의해 멸망을 당했을 수도 있다. 선지자는 요청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14:2-3). 선지자의 사역은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멈추었지만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아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전달된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 14:4).



사진: 텔단 (단지파의 땅) 도시 입구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은 선지자와 동일한 이름인 호세아였다. 왕은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구원은 왕이나 바알이 아닌 여호와께만 있다. 선지자는 그의 글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한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 14:10). 역사의 한페이지였던 호세아서를 읽어내려가는 우리에게 선지자는 묻는다. 내안에. 우리안에. 교회안에 감추고 싶은, 알리고 싶지 않은 또 다른 바알이 있지 않은가? 여호와만이 내가 섬길분이라는 것을 고백하지만 여전히 그 분은 필요를 채워주는 밴딩 머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지 않는지, 여호와를 가장한 바알을 숭배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사랑의 기다림의 손짓을 멈추지 않는 하나님과 순결한 사랑에 빠져 있는가? 이제 삶의 한 페이지 구석에 얽룩져 있는 바알숭배와 고멜의 흔적들을 내려놓을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이다



*** 위 글은 기독교 잡지 "새가정사" 3월호에 연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