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성의 목마른 영혼을 위한 물

Public Diary 2014.01.03 12:10 Posted by Israel


이스라엘의 북쪽끝 헬몬산 자락 아래에서 남쪽 홍해까지 연결되는 90번 도로는 요단 계곡, 학명으로는 리프트 계곡이라는 계곡길을 따라 연결되어 있다. 옛 랍비들은 한 여름에 요단 계곡길을 걷는 것은 마치 지옥의 아랫목에 두터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만큼 요단 계곡길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요단강 물의 증발과 뜨거운 햇볕이 만들어내는 열기가 대단한 곳이다. 겨울철에 내린 비로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푸르름을 자랑하던 겨자와 아네모네 꽃들도 요단 계곡의 여름 햇볕 아래에서는 맥을 못추고 이내 시들어 버린다. 


에어컨이 완비된 버스를 타고 90번 도로를 달리면서 바라보는 요단 계곡길은 푸른 낭만 혹은 갈색톤으로 물든 황금 들녘, 간혹 보이는 양떼들과 목자 그리고 채소밭에서 일하는 아낙네들의 목가적인 모습을 즐길수 있다. 그러나 막상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차를 타고 달리면 어서 빨리 요단 계곡을 빠져나갔으면 하는 바램뿐 주변을 여유가 없다. 그 길은 그 옛날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이다. 그 요단 계곡 길을 따라서 어릴적부터 부모를 따라 유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적어도 일년에 3번 이상 예수께서는 요단 계곡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 



(사진: 요단 계곡) 


상상이다! 예수께서는 결코 만만치 않은 그 요단 계곡길을 따라 오면서 계곡 서쪽으로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사마리아 산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마치 "잔듸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꽃혀 있는 양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산지길을 따라 난 비교적 수월한 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갈수 없었다. 예수께서도 그 이유를 묻거나 혹은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혹은 일행중에 있던 랍비들을 통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거주민들 사이에 등을 돌리고 서로 창끝을 내밀어야 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듣고 배웠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바라만 보았던 사마리아였다. 예수의 눈에 비쳤던 사마리아 산지길은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었다. 그 안에 회개와 생명의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인생들이 내일의 소망없은 백성들의 땅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 


갈릴리, 유대 광야,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사역 기간 동안 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들은 놀랐다. 예수의 가르침에, 그들은 즐겼다. 예수의 공급하심을.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예수의 기적에. 생업을 뒤로하고 예수를 쫓았지만 해가 지중해속으로 그 빛을 감추듯 때가 되면 화호성과 따름을 뒤로 하고 등을 돌린채 돌아서는 것이 군중이었다. 어쩌면 예수의 사역은 물량주의에 가치를 두는 현대 사회, 아니 현대 교회의 가치 기준으로 볼때 철저히 실패한 사역이었다. 그는 군중몰이를 할줄 몰랐다. 군중들이 그를 따랐지만, 그는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군중들이 그를 주목하였지만, 그는 스스로 군중의 주목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군중이 박수를 쳤지만, 그는 군중의 박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군중은 그로부터 받았지만, 그는 군중으로부터 그 무엇도 받지 않았다. 군중에게는 돌아갈, 그리고 쉴 수 있는 잠자리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머리 둘곳도 없었다. 



(사진: 사마리아의 한 마을) 


예수께서는 그 사역의 가치를 개인에게 두었다. 철저히 개인 중심적이었고 한 사람을 만나, 그 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변화시켰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성서는 말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물량주의, 성과주의의 가치앞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한 영혼의 가치이다. 교회의 가치는 "양"에 있지 않다. 예배의 가치 역시 "양(Quntity)"에 있지 않다. 미가 선지자가 피를 토하듯 외쳤듯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슨 가치가 있었던가? 수많은 예배의 손이 올려지는 곳에만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시골 구석에 있는 쓰러져 가는 예배당에도, 한 영혼이 있는 그 자리에도 하나님은 계신다. 푹신 푹신하고 안락한 의자, 잘 꾸며진 프로그램이 있는 교회에만 주님은 임재하지 않으신다. 성막이 있었던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곳은 먼지 바람이 날리는 광야였다. 구원받아야 할 한 영혼이 있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면 주님의 임재가 있다. 





(사진: Google Image) 


만남...


그 한 영혼을 예수께서는 찾으셨다. 창세 이전에 준비되었던 그 만남을 위해... 창세 이전부터 예비하였던 죽음을 통한 구원을 위해...그 만남의 자리로 찾아 오시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오셨다. 그리고 30여년의 짧은 생애 가운데 그렇게 기다리던 그 만남의 자리로 오셨다. 


야곱의 우물...


우물속에 비치는 그 얼굴 조차도 보기 싫었다.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주름과 햇살에 검게 그을린 얼굴, 인생의 쓰디쓴 실패와 좌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그런 인생. 내일 태양이 다시 떠 오르는 것이 그토록 싫었던 인생이었다. 갈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물을 마시기 위해 오지만 그 안에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갈증,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증으로 인해 영혼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정오의 햇살보다 더 무겁고 더 뜨거운 삶의 가시밭길속에서 찾아온 야곱의 우물. 그녀는 혹이라도 얼굴이 우물에 비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린채 우물 곁으로 다가왔다. 그때 들린 목소리... 



(사진: Google Image) 


물을 요구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의 눈빛과 말은 그녀가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인생 도화지의 한 장면 장면들을 떠 올리게 만들었다. 예배가 아니었다. 그리심 산도 아니었다. 그녀의 다섯 남편도 아니었다. 우물도 아니었다. 그 무엇도 그녀의 삶을 채울수는 없었다.그녀가 물동이를 버린 순간. 그녀가 등을 돌려 마을로 향하는 그 순간. 마을로 뛰어들어가 자신이 만난 예수를 전하는 그 순간 여인은 자신이 예수께서 찾던 그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사진: 야곱의 우물 표지판 - 동방 정교회)


사마리아 수가성을 찾았다. 그 옛날 야곱의 우물이 있다는 동방 정교회 예배당 지하에 내려가서 그 우물 물을 마셨다. 그 여인이 마셨던, 그리고 예수께서 마셨던 그 우물 물을 마셨다. 마을 어귀에 있었을 야곱의 우물은 교회 예배당에 모셔져(???) 있었고 수가성은 이미 도시가 되어 있었다. 수가성 양 옆으로는 에발산과 그리심 산이 지금도 여호수아의 목소리를 간직한 채 서 있었다. 길 양옆으로는 바쁜 차량의 행렬들과 길거리 상인들, 그리고 상인들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치고는 제법 활기가 찬 마을이다. 그 땅에 매료되었고  또 다시 오고 싶었다. 또 다시 야곱의 우물을 찾아 그 물을 마시고 싶었다. 그저 목마른 목을 축이기 위한 물이 아닌, 한 영혼을 찾아 오셨던 예수의 갈증을 가슴으로 느끼기 위해...그 영혼을 향한 갈증이 없는 슬픈 나를 채찍질 하기 위해 또 다시 그 우물곁으로 가서 서고 싶다.